■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해남 용두리 고분

<5> 마한 남부 연맹의 패자, ‘침미다례“(上)

전남 중심부에 있던 연맹왕국

전남 어느 지방 자치단체 홈페이지를 보면 백제 근초고왕 때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 영암군 홈페이지에는 그렇게 기술되어 있지 않아 다행이지만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이미 통설화 되어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어느 지자체에서 발행한 중ㆍ고등학생용 교재 서문을 보면,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는 4세기 이후 마한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4세기 이전의 마한 모습은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4세기 이전의 마한의 모습은 더더욱 없다. 우리가 근초고왕 때 마한 지역이 백제 지역에 편입되었는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근초고왕과 맞섰던 ‘침미다례’를 비롯하여 ‘내비리국’ 등 우리 지역에 존재하였던 많은 마한 연맹 왕국들을 놓치고 있다.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목지국이 백제에게 멸망한 후 백제를 비롯하여 여러 대국들 간에 연맹체 세력의 주도권과 마한의 정통성을 둘러싼 쟁탈전이 본격화되었다. 이 ‘대국’에 해당하는 연맹왕국의 하나가 영산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내비리국’이었다. 이와 더불어 .‘침미다례(忱彌多禮)’ 또한 주목된다.

침미다례의 존재는 『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에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와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屠南蠻忱彌多禮)’ 백제에게 주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언급된 54국은 물론 『삼국사기』 등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어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일본서기 구절은, 백제 근초고왕이 369년에 이 지역을 공략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대부분 동의를 하고 있다. ‘도륙을 냈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침미다례’는 지명이 아니라 왕국 명칭이 분명하다.

‘침미다례’의 위치에 대해 현재 고흥반도설, 강진ㆍ해남 일대설, 영산강 유역설 등 논란이 많지만 우리 지역에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침미다례의 세력 근거지에 대해 최근 들어 논의가 활발하나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침미다례’가 언급된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만 가지고 위치를 추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일찍이 일본 학계에서는 ‘침미다례’와 ‘탐라(耽羅)’가 음이 비슷하다 하여 제주도에 비정을 하였으나 탐라가 백제와 처음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이 508년으로, 침미다례를 369년에 도륙했다고 하는 것과 시기가 너무 동떨어져 있다. 강진ㆍ해남 지역설은 문헌 사학계에서 주로 주장하고 있는데, ‘침미’가 일본어 훈 ‘도무(トム)’이므로 백제시대 도무군에 해당하는 강진·해남 일대라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 지역에 설치되었던 현재 해남 현산면에 해당하는 침명현(浸溟縣)이 침미와 음이 비슷한데다 백제가 침미다례를 공격하기 전에 점령한 고해진과 가깝다는 점도 주된 근거이다.

반면, 임영진 교수는 고흥반도에 전남 지역의 가장 많은 지석묘와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고, 고흥의 안동(雁洞) 고분에서 출토된 범백제계의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으로 미루어 그곳에 '침미다례'와 같은 정치 세력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하지만 이 설은 고고학적 유물만 가지고 추정한 것으로 지명의 유사성 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내린 결론이라는 한계가 지적된다.

한편, 일부에서는 나주 반남 고분군과 복암리 고분군 등과 같이 영산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는 거대한 고분을 만들 수 있는 집단이라면 적어도 ‘침미다례’와 같은 정치 세력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영산강 유역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침미다례가 바다를 끼고 있었다는 중국 진서의 기록과 맞지 않고 지명의 유사성도 떨어진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필자는, 고대 지명이 언어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침미다례’가 음운상으로 침명현(해남), 훈독상으로 도무군(강진)과 비슷하고, 지리적으로도 고해진과 가까운 강진ㆍ해남 일대설을 따르고자 한다. 게다가 인근 송지면 군곡리의 거대한 패총, 삼산면 신금리 주거 유적과 옥녀봉 토성 유적, 장고산과 용두리에 있는 거대한 장고분 등의 존재는 이 지역이 적어도 기원전 후부터 5세기 중엽까지 강한 정치 세력, 즉 ‘침미다례’ 왕국이 존재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제 장고산 고분이 있는 해남 북일면, 용두리 고분이 있는 삼산면은 일찍이 행정구역이 강진이었고, 그곳과 해남 송지면 군곡리 패총이 있는 백포만 해안까지 불과 30여 km 정도 떨어져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강진만과 해남반도 일대가 ‘침미다례’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목포대 강봉룡 교수가 옹관고분의 분포를 통해 해남일대를 침미다례의 거점으로 살핀 것은 이러한 점에서 타당하다고 본다. 다만, 강 교수가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일대가 당시의 중심 세력권이었고, 해남 지역은 그 주변부에 해당하였다고 살폈지만, 이는 영산강 유역의 또 다른 대국인 ‘내비리국’의 존재를 간과한데서 나온 결론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독자적인 연맹세력 구축

해남 군곡리 패총

한편, 4세기 후반 당시 ‘침미다례’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의 강력한 정예병 3만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근초고왕 군대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항복하지 않고 ‘도륙(屠戮)’ 당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끝까지 저항한데서 결코 미약한 세력은 아니었다. 이처럼 백제가 ‘침미다례’를 도륙하려 했던 것은 ‘남만’, 즉 ‘남쪽 오랑캐’라고 불렀던 백제의 인식의 반영이었다. 말하자면 침미다례가 백제 중심의 연맹체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연맹세력을 구축하며 맞섰던  것에 대한 반작용의 산물인 셈이다. 여하튼 ‘침미다례’가 이 지역에 위치한 마한 연맹체의 중심 세력의 하나로 위서 동이전의 ‘대국’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측 진서(晉書) ‘장화전’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282년)동이 마한의 ‘신미’ 등 여러 나라들이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살았다. 유주와 4천여 리 떨어져 있다. 여러 대에 걸쳐 사신을 보내지 않았던 20여 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並遣使朝獻). 9월에 동이 29국이 귀화하여 방물을 바쳤다”

3세기 말 마한 연맹체와 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명한 기록인데, 여기에 보이는 ‘신미’는 유주와 4천여 리 떨어져 있고 바다를 끼고 있는 곳으로 미루어 볼 때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추정되고, ‘침미’와 음이 비슷하므로 해남 강진 지역에 위치한 ‘침미다례’와 동일 왕국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일본서기』에 보이는 ‘침미다례’가 『진서』 장화전의 ‘신미국’과 음이 비슷하다는 주장은 이병도 박사가 일찍이 주장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백제사 연구의 권위자인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 역시 ‘침미’와 ‘신미’가 음이 비슷하고 ‘다례’는 국(國), 읍(邑)을 의미하는 ‘다라·드르’와 상통하기 때문에 ‘침미다례’는 ‘신미국’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시간상으로 볼 때 ‘신미국’을 ‘침미다례’가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중국과 일본 역사서의 기록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백제 중심의 연맹 거부

처음에 신미국을 포함한 20여 국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고, 다시 29국이 귀화를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귀화’라는 표현은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을 당시 유주자사 장화가 과장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할 때, 적어도 신미국을 포함한 29개 왕국이 중국에 조공을 하러 간 사실을 보여준다. 이때 29국은 같은 연맹체로, 목지국이 붕괴된 직후 마한 연맹의 절반 이상 국가들이 백제 중심의 연맹을 거부하고 신미국 중심의 연맹으로 합류한 모습을 짐작한다.

특히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이라는 구절이 주목되는데, 백제가 마한을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동이의 백제와 신미’라고 대칭적으로 살피기도 하지만, 오히려 ‘동이에 있는 마한의  신미국’으로 이해하여 신미국이 동이의 마한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당시 중국에서도 신미국, 즉 침미다례가 마한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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