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금동관. 신촌리 9호분

<4> ‘영산 지중해’를 지배한 '내비리국'(下)

 

영산강 유역의 대형 옹관 고분 등에 대한 발굴 조사 등이 이루어지기 이전까지는 기껏 금강유역 청동기 문화권과 철 생산 중심지로서의 변한·진한에 주목하였을 뿐 영산강 유역의 정치체에 대해서는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즉, 한강과 금강 유역의 마한역사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서기’의 근초고왕이 전남 남해안 일대를 공격하였다고 하는 기사의 의미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백제가 일찍부터 이 지역을 지배했다는 관념이 굳어졌다.

그러나 시종 반남지역 대형옹관 고분발굴 등 고고학적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어 문헌에 드러나 있지 않은 역사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면서 4세기 후반부터 백제가 전남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기존 이해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문헌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한 마한남부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고고학적인 연구의 중요함은 절대적이라 하겠다.

그런데 새로운 유적·유물을 통한 고고학 연구성과가 축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영향력을 전제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따라서 선입관을 걷어내고 고고학적 해석을 하고 ‘반내부리’와 같이 후대의 기록에 묻혀 있던 역사적 사실들과 유기적으로 연결지어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독자적 문화전통 발전시켜

누차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 전남지역은 지석묘, 옹관고분, 석실분 분포지역의 밀집도와 지속성이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강하다. 노령산맥 이남 지역은 고구려나 낙랑과 멀리 떨어져 있어 유이민 세력의 힘이 약하여 토착 세력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지역은 문화적 동질성이 상대적으로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옹관고분이라는 고분형태가 영산강 유역이라는 특정지역에 오랫동안 집중되어 있는 것도 이 지역의 고유한 문화의 특질을 뚜렷이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일본 近畿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 이른바 ‘영산강식 토기’가 이를 말해준다고 믿는다.

‘내비리국’은 이처럼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영산 지중해의 중요 항구들을 통해 유입된  이질적인 문화를 독자적인 문화전통으로 새롭게 발전시켜 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되어 국보 295호로 지정된 금동관은 천안 용원리·서산 부장리·공주 수촌리·익산 입점리·고흥 갈두리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계통의 금동관과 성격이 다르다고 한다.

하니와. 신촌리 9호분 출토

가령, 관을 장식하는 주요 요소인 보주가 달린 3단의 가지 장식이 복합사선문을 주로 하여 장식되고 있는 점은 언뜻 보면 백제 가야 양식처럼 보이지만 왜 계통에 가깝다. 은장 대도의 경우도 기본형은 백제 대도와 비슷하지만 환내도상을 별도로 만들어 끼워넣는 기법 등은 대가야 대도와 비슷하다. 광주 명화동과 월계동 고분, 함평 장고산 고분 등 주로 장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분주토기’는 원래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고분 주위나 정상부에 토기를 둘러놓은 특유의 양식인 ‘하니와’와 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하니와’와 유사한 토기들이 신촌리 9호분에서 수십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장고분이 아닌 일반 고분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출토된 ‘호형 하니와’는 재지적인 성격이 농후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백제, 가야, 왜 등 여러 지역문화 요소와 더불어 재지적인 특징, 즉 고유한 문화의 특질이 함께 보이고 있는 것이 ‘내비리국’ 문화의 특징이라고 여겨진다. 즉 ‘내비리국’ 문화의 독창성은 바로 개방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동안 반남지역에 형성된 고유한 문화요소는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가 미치지 않는 간접 지배체제의 산물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내비리국’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백제 중심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한다.

족적 공동체…정치체 발전은 늦어

한편, 시종과 반남 일대에 대형고총 옹관고분들이 수 십기 이상 밀집되어 있는 것은 이 지역의 토착 세력들의 규모가 상당함을 보여준다. 둘레길이 45m, 높이 8m의 덕산리 3호분과 5호분에서는 銀製玉과 金銅裝飾金具片·大刀·구슬 등이 출토되었는데, 신촌리 9호분 피장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규모나 부장품으로 볼 때 상당한 세력가임은 분명하다. 반남 지역의 고분 분포를 보면, 신촌리 9호분 조영 집단을 정점으로 여러 세력들이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분의 규모가 비슷하고 유력 연맹장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곳곳에서 보이는데서 ‘내비리국’ 수장의 권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반남 일대에 대형고총 고분들이 군집되어 있는 것은 다른 마한 연맹왕국처럼 ‘내비리국’ 연맹왕국도 연맹체 간의 우열이 크지 않고 분립성이 강고하였음을 알려준다. 특히 대규모 전쟁도 없어 느슨한 단계의 통합 수준을 벗어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고령 지산동 44호 고분에서는 무려 35인 이상이 순장되어 있는 흔적이 보여 대가야의 강력한 국왕권을 상상하게 하지만 영산강 유역에서는 이러한 순장 풍습도 거의 보이지 않아 절대적인 권력자가 성장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을 보면 한 고분에 여러 피장자가 있는 다장의 풍습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아직 족적 공동체의 성격이 온존되어 있다고 이해된다. 말하자면 연맹 내부에서 계층 간의 위계화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영산강유역 정치체의 발전이 늦은 이유는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도 한 몫하고 있다. 한강 유역에서는 4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 사용이 급증하고, 영남지방도 U자형 삽날 쇠스랑 등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지만, 영산강유역의 고분에서는 철제 농기구가 거의 출토되고 있지 않다. 이는 내비리국 근처에 철광산지가 있어 약간의 철제품과 장식 대도 등 철기와 관련된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하더라도 황토와 충적토가 많은 영산강 유역의 내비리국의 특성상 철제 농기구 대신 목제 농경도구를 쓰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볼 때 철기의 사용이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내비리국이 비록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구가하여 영산강유역의 대국이 되었지만 철기 사용을 통해 권력 집중과 분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산력의 확대와 인구의 증가가 곧 고대사회의 성장을 질적으로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해 준다.

국력과 높은 문화적 역량 갖춰

한편, 신촌리 9호분 피장자가 독자적인 권력을 배타적으로 발휘할 수 없자 백제의 위세품을 받아들였다는 의견도 있으나 동의할 수 없다. 5세기에 들어 왜나 가야 등에서 점차 강력한 정치세력이 대두하고, 백제의 압력이 가중되자 ‘내비리국’ 중심의 마한남부 연맹체도 보다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려 했을 법하다. 금동관을 쓰고 무령왕릉보다 더 많은 환두대도를 사용한 신촌리 9호분 피장자의 모습에서 왕권을 전제화하려는 ‘내비리국’ 국왕을 상상해본다.

5세기 말 한강 이북까지 진출한 고구려 세력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백제는 남방을 경략할 여력이 없었다. 백제는 475년 한강을 상실하고 웅진 천도를 하면서 남방 진출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이 직접 무진주에 군대를 이끌고 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이 과정에서 마한남부 연맹의 핵심이었던 대국 내비리국에 대한 압박이 본격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내비리국은 수많은 대형고분을 조영할 수 있는 국력과 세련된 금동관 등을 제작할 수 있는 높은 문화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는 결코 쉽게 굴복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내비리국을 무너뜨린 백제가 그곳에 행정구역을 설치할 때 ‘반(半)’이라는 글자를 넣어 절단 낸다는 의미의 ‘반내부리’라는 명칭을 사용한데서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내비리국이 백제 중심의 연맹체를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백제가 내비리국의 정치적 비중을 고려할 때 최소한 ‘郡’ 이상의 행정구역을 설치해야 하지만 반나부리 ‘縣(현)’이라 하여 그 격을 떨어뜨린 것은 이 지역의 성장을 경계했다는 것이 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반나부리현’을 ‘반남군’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재지세력의 현실적인 영향력을 인정해준 것이라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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