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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평야를 기반으로 남해만 일대까지 장악한 ‘대국’■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3> ‘영산 지중해’를 지배한 '내비리국'(中)

영산지중해

우리에게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의 기록’이라는 말로 유명한 20세기 후반 영국의 세계적 역사학자인 E.H.Carr가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지만, 역사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동안 쌓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17년은 일제가 신촌리 9호분을 발굴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들이 이곳을 발굴한 것은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지금 살피고 있는 반남지역도 백제가 ‘내비리국’을 절단 낸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면, ‘반남’이라는 지명에 백제에게 끝까지 저항하다 강제로 병합되었던 슬픈 역사가 깃들여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해만 연안 ‘해륙(海陸) 세력으로 성장하다

영산 지중해를 끼고 있는 시종·반남 지역에는 기원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정주(定住)했다는 것은 수문포 패총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2세기 전후 동북아시아에 형성되었던 한랭기로 인해 곡물 생산량이 급감하자 사람들이 해안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그곳에 본격적인 정치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산 지중해’가 형성되어 있었던 남해만 연안은 전형적인 감조하천으로 영산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충적토로 이루어진 옥토 지대였다.

수문패총(점뼈)

수문패총에서 출토된 많은 종류의 어패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갯벌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해산물 또한 경제적 수준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이 지역은 일찍부터 부강한 연맹 국가가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임영진 교수는 시종과 반남 지역을 ‘삼포강권’이라는 하나의 정치체로 설정하기도 하였다.

현재 시종천을 사이에 두고 영암 시종 지역의 내동리 쌍무덤·신연리·옥야리 고분군과 나주 반남 지역의 신촌리·덕산리·대안리 고분군으로 고분 밀집군이 나누어져 있는데, 반남지역에는 전성기의 옹관인 전형적인 U자 형태가 많이 분포하고 있어 시종지역 옹관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늦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시종지역이 반남지역 보다 먼저 정치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같은 남해만을 이용하고 있는 등 삼포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단일한 생활권을 형성하였던 두 지역 즉, 남해만 연안지대에 위치하여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내륙으로 들어갈 필요성이 있었던 시종지역과 내륙에 위치하여 해상교역에 필요한 포구가 필요했던 반남지역은 서로 통합의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3세기 중엽 목지국의 멸망으로 인한 정치적 상황은 마한연맹 왕국들 사이에서 세력 결집의 필요성을 높여주었을 법하다.

백제 건국이 영산강유역 정치세력의 결집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필자처럼 백제의 목지국 병합 때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내비리국’ 명칭이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이미 보이고 있는 것은 이를 반영한다. 대부분 학자들이 현재의 영암 일대에 존재했다고 하는 ‘일리국(一離國)’ 영역에서 시종지역을 빼고 있는 것은 시종 일대가 반남지역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비리국, 대외교역을 장악하다

‘내비리국’은 늦어도 3세기 말 반남평야를 기반으로 남해만 일대까지 장악한 ‘대국’이 되었다. 주구토광묘가 대부분이었던 영산강유역에 새롭게 3세기 후반에 이르러 옹관묘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일부에서는 4세기에 이르러서야 지역 정치체가 성립되고, 5세기에 이르러 통합화 과정을 거쳤다고 하여 연맹왕국의 성립 시기를 늦추려는 경향이 있다. 남해만 연안지역을 망라한 단일한 정치체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4∼5세기에 이르면 반남지역에 이미 고총(高塚) 단계의 대형 옹관고분이 조성되는 등 전성기의 발전을 보이고 있어 받아들일 수 없다. ‘내비리국’ 왕국이 3세기에 성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데서 나온 결론이라 생각한다.

영산강 유역이라는 특정지역에 옹관고분이 집중되어 나타난 까닭에 대해 난생설화와 관련을 짓기도 하지만 난생설화를 가지고서는 왜 영산강유역에 집중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남해만 일대가 간석지와 충적토가 많고, 주변 내륙도 황토지대여서, 고인돌이나 토광묘를 조영하는데 필요한 돌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옹관을 사용한 박장(薄葬)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반남지역을 중심으로 옹관고분이 고총형태를 띠고 대형화되고 있는 까닭을 필자는 고분의 부장품에서 보이는 가야, 왜 문화의 영향에서 찾고 싶다.

말하자면 시기가 약간 늦기는 하지만 왜 계통의 거대한 장고분 등이 인근에서 조영되고 있었듯이, 당시 ‘내비리국’ 등 영산 지중해 연안의 연맹국들은 가야, 왜 등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어 그 지역의 거대한 고분문화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정치적 수장들은 왜와 가야처럼 거대한 고분을 조영함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드러내려고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이들 옹관고분은 분구 규모로만 보면 가야의 대규모 고분 또는 심지어 백제의 왕릉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다.

이러한 대형 옹관고분이 반남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이 지역 토착세력의 힘이 강했을 뿐 아니라 ‘내비리국’이 부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산강식 토기’, 독자적 전통 토대를 닦다

고고학에서는 성곽과 고분이 고대국가 성립의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반남 일대에 대형 고총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사실은 그곳에 고대국가가 성립되어 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고총 고분에서 ‘영산강식 토기’ 양식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고총의 중심지인 ‘내비리국’이 영산강 유역 연맹체를 대표하는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산강식 토기’의 편년을 5∼6세기로 잡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5세기에 이르러 영산강유역에 분립되어 있던 연맹체들이 내비리국 중심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박순발 교수가 5세기 중엽 영산강 토기문화가 완성되는 것은 반남을 중심으로 정치적 통합을 달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살핀 것은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에는 성곽 등의 유적이 없어 정치체가 존립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지리적 환경의 이해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반남지역에는 해발 94.5m에 불과한 작은 자미산이 있는데 이곳에 대국을 건설할 산성을 쌓기에는 부적합하다.

말하자면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영산강유역은 성곽보다는 오히려 영산강 본류나 하류지역의 배후 습지가 국가의 중요한 경계였을 것이다.

한편, 영산강 양식의 독자적 토기 문양이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무렵에 완성되었다는 의견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영산강유역 문화의 독자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내비리국 중심의 연맹왕국이 하나의 정치체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영산강 유역의 대국인 ‘내비리국’은 해남 반도의 ‘침미다례’와 더불어 마한 남부 연맹의 핵심 세력이었던 것이다.

당시 내비리국은 백제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5세기 전반기의 영산강식 토기가 서울 풍납토성에서 확인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를 가지고 영산강 세력이 백제에게 공물을 바친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신촌리 9호분 등에서 철정(鐵釘) 등 가야 철기문화와 왜에서 유행한 ‘하니와(埴輪)’가 출토되고, 일본의 스에무라(陶邑)의 스에키 토기에서 영산강식의 유공광구 소호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내비리국이 백제, 왜, 가야와 교류를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비리국’이 가야, 왜와 교류한 품목을 보면 주로 토기, 장식물 등이 많아 경제적인 목적이 주였다고 생각되지만 백제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계속>
 

박해현 박사  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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