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5대강이 있다. 낙동강, 한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이 그것이다. 섬진강은 전남의 동부를 관류하는 강으로 영산강보다 길지만 산간을 흘러 농지면적이 협소하다.

따라서 담양 가마골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전남의 중앙부와 서남부를 흐르면서 광활한 경지면적을 적시는 영산강을 4대강에 포함시키고 있다. 영산강 유역은 곡창지대로 불리어 예로부터 나라의 세곡을 모아 수도권으로 수송하는 조창(漕倉)이 네 곳이나 있어 중앙정부의 재원조달 기지가 되어 왔다. 영산강 유역의 풍흉은 국가에서도 중시하는 관심지역으로 여겨져 왔다.

올해는 유난히 가뭄이 심각하다. 수리시설이 불완전한 농경지는 농사철을 맞아 이만 저만한 어려움이 아니다. 특히 영산강 유역 중 영산호 물이 아직 닿지 않는 영산강 4단계 사업지역(무안, 신안, 함평, 영광 육지부)은 한해가 우심하다.

영산강 4단계 사업지역은 당초 간척사업을 통해서 확보한 담수를 농업용수로 활용할 예정이었으나 간척사업을 취소하고, 영산호의 물을 끌어다 쓰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487km에 이르는 용수로를 설치해서 16,730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할 계획으로, 2001년 12월에 착공하여 42%의 진도에 머물고 있다. 정부예산이 조속히 확보되어 경작자들의 시름을 덜어주기 기대한다.

영산강 유역의 한해는 관개시설이 미비한 예로부터 있어 왔다. 영산강 유역의 가뭄피해가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 온조왕 4년(기원전 15년) ‘춘하아질(春夏餓疾)’이란 내용이다. 이 기록을 보면 처참하기까지 하다. 봄 여름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어 죽게 됨으로 서로 ×××× 도둑떼가 크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근세 기록으로는 병자년(1875년) 대한발 때 ‘하지 전부터 일곱 차례나 기우제를 지내고 비를 보았다’라 적고 있다. 1929년 한발에는 영산강 유역 피해가 매우 컸으며, 1939년 한발 때는 4월부터 7월까지 평년 강우량의 40%밖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하니 그 정도가 어떤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1942년과 6.25 후인 1955년에 큰 가뭄이 있었고, 1967년 68년의 한해는 영산강농업종합개발사업 추진의 계기가 되어 영산강 1-3단계 사업이 이미 끝나 농업용수로 활용하고, 제4단계 공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예로부터 국가의 대업은 치산치수라 했다. 물 관리를 잘하여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지어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이 치세의 근본이라 했다.

따라서 가뭄극복을 위해 보와 저수지를 막고 농법개량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왔다. 특히 조선조 정조께서는 재위 24년의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농업과학기술진흥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농사에 필요한 ‘농가지대전(農家之大全)’이라는 책을 펴내기 위해 1798년 정조 22년에 전국의 실학 유생들에게 농업기술발전을 위한 방안을 제안하도록 윤음을 발표했다. 정조 22년 1798년 11월 30일 정조실록에 의하면 27명의 유학(幼學)들이 의견을 제시했다 한다. 유학이란 벼슬을 하지 않은 유생으로 농촌의 지식인을 뜻한다. 여기에 영암출신 유학 한 분이 들어 있어 반가운 마음에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정시원(鄭始元)이다. 인적사항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영암 정씨 문중의 족보를 찾아보면 혹시 어디 거주했던 어느 유생인지 밝혀질지 모른다. 찾아보았으면 싶다.

당시 그는 관수로식 농업용수관개법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았다. 물은 지형에 따라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데, 논이 물 아래쪽에 있더라도 그 사이에 구릉이나 골짜기가 있으면 물길이 끊어지기 마련이므로, 이럴 경우 통을 설치해서 물을 끌어가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즉 질그릇으로 통을 굽되 속을 통하게 하고 밖은 둥글게 만들어 상류에서 차례로 이어 묻은 다음, 통속으로 물을 끌어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저수지나 보를 만들어 얻는 이익에 못지않다고 강조했다.

이 제의에 대해 정조는 호조판서 조진관과 선혜청 당상 정민시에게 시켜 정시원을 만나 그 방법을 물어보도록 했고, 이들은 이를 실험까지 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는 ‘농가지대전’의 편찬을 보지 못하고 1800년에 사거(死去)하고 말았다. 헌종 때인 1840년에 발간된 관개도보(灌漑圖譜)에도 정시원의 제안이 수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정조 서거 후 흐지부지된 것으로 보여진다. 무척 아쉽다. 그러나 자랑스럽다. 이 도수방법은 영산강 사업에서 시공한 공법과 같은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영산강은 우리 삶의 젖줄이다. 한해를 막아주는 하늘의 물길이다. 관리를 잘 하여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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