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꼭 알아야 할 한·일 관계사

제1장 들어가는 말 

“일본은 축소지향적일 때에 확대(번창, 筆者 註)되고, 확대 지향적일 때에 축소(패망)된다.”고 이어령 교수가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그의 저술에서 지적하여 1980년대부터 일본인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켜 이제는 일본의 고전(古典)이 되었다.
그렇다. 일본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접우산 등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진출했을 때에는 세계시장을 석권하면서 G-2자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들이 확대지향을 위해 섬나라 일본을 탈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교두보인 우리 한반도를 침략해왔을 때에는 패망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한반도를 침략할 때는 꼭 침략의 명분을 내세웠다. 
임진왜란 때에는 풍신수길이 우리에게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웠다.
이는 일본의 폐쇄적이고 섬나라다운 사고의 발상으로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광란적(狂亂的)사례이다.
이로 인해 대륙진출을 노리던 일본의 풍신수길 가의 정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300여년 이후 일본은 또다시 대륙진출을 목적으로 한반도를 강제로 병탄하고자 고토회복(故土回復)이라는 해괴한 역사를 들추어 이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한반도를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한 그들의 광란적 전쟁질주(戰爭疾走)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서야 끝이 난듯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는가 하면, 군 위안부 문제를 간교하게 부정하고 있다. 

제2장 일본의 조선침략 명분

일본은 조선을 강제 합방하기 위한 조선침략의 명분으로 역사를 왜곡 내지는 조작하여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내세웠다.
임나일본부설이란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4세기 중반에 일본이 대군을 거느리고 한반도에 건너와서 14년간에 걸쳐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고 369년 가야지방에 한반도의 남부를 통치하는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는데 신라가 569년에 가야지방을 침략하여 신라의 영토로 하였다.(720년 기록한 일본서기)
▲야마토 정부인 왜가 391년 신묘년에 신라와 백제를 쳐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광개토왕릉비문) 이와 같은 임나일본부설은 1960년대까지 일본과 한국 사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그러나 1972년 재일교포 이진희 명치대학교수와 일본의 나카쓰카 아키라 사학자
-1960년대 북한의 김석형과 박시형 사학자들에 의하여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과 위작 과정을 제기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일본 사학계에서조차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는 학자가 없다.  

◊ 임나일본부설의 위작 과정과 허구성
일본은 1883~84년에(우리나라에서 갑신정변이 발생) 일본군 참모본부소속 육군 위관장교 사코와 쿠르스를 만주 집안지역에 밀정으로 파견하여, 광개토대왕릉의 비문을 탁본으로 가져와 일본군 참모본부 편찬과에 제출, 일본의 저명한 한문학자와 역사학자를 동원하여 5년간의 해독과 해석을 거쳐 광개토왕릉비문을 34번의 원고 수정을 거쳐 1889년 6월 회여록(會餘祿)제5집에 수록하였다.(근대 일본의 조선인식, 나카쓰라 아키라지음, 179~181쪽)
그러나 공개된 비문은 탁본이 아닌 고구려 고비문(高句麗古碑文)이라 부르는 사진석판(寫眞石版)이었을 뿐으로,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비를 세운 목적은 그의 부친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후손에게 보여 주기위한 것인데, 그 비의 설립 목적에 반하는 일본에 관한 기록을 상세히 기록할 이유가 없다. 
▲일본의 4세기 중반 국내 정세는 야마토 정권이 국내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5~6만 명의 대군을 14년이란 장기간 한반도에 파병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언어도단이다.  
    
제3장 일제강점기
일본이 말살한 우리역사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오래전부터 한국사를 연구해왔다.
개인적으로는 주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필두로 그 문하생들이 한국사를 연구하면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웠다.
국가적으로는 1880년대 초부터 일본군 참모본부에 편찬과를 만들어 우리나라 역사서 등 자료를 수집·분석하여 한국사를 왜곡, 침략의 명분을 찾고 우리민족을 반일본인화(半日本人化)하여 영구히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우리의 민족혼(民族魂)이요, 민족의식(民族意識)인 우리역사를 말소, 일본 대화족(大禾族)에 동화하는 정책(同化政策)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일본의 우리역사 왜곡 방침
일본이 한국사를 조작 또는 날조하여 우리 역사를 폄하, 그들의 역사가 우리 역사보다 우월하다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그 추진 방침은 첫째, 한국의 역사를 일본 보다 줄인다.
둘째, 단군 이전의 역사를 신화화(神話化)한다.
셋째, 쓰여진 역사도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조장하는 쪽으로 해석하여 선조(先朝)에 대한 실망감과 허무감을 갖게 한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교육시책
3.1만세운동 이후 문화통치(文化統治)를 표방하면서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신교육(新敎育)시책은 다음과 같다.
“총칼로 지배하는 것은 순간의 효과밖에 없다. 남을 지배하려면 철학·종교·교육·문화를 앞장세워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악행을 들춰내 그것을 과장하여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를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氣風)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정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서적(書籍),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半日本人)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조선총독 재등실의 신교육 방침이었다.
사이토 마코토의 신교육 시책으로 해방 후 오랫동안 우리에게 내면화(內面化) 된 사례들 중 몇 가지 잘못된 용어를 보면
▲조센진은 사색당파에서처럼 분열을 좋아한다.
▲조센진은 ㅇㅇ할 수 없다.(조선민족의 자포자기 심을 내면화하기 위함.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조센진은 게으르다 등 아주 많다.

역사서 20만권을 소각하고, 조선사편수회가 역사조작 구심점  
일본은 1910년 8월 조선을 강압으로 병탄하고 데라우치 마사다케(1910~1916년)가 부임하여 그해 11월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取調局)을 마련하고, 모든 역사서적을 수색하여 1911년 말까지 51종 20만권을 약탈하여,
이중 단군조선 등 우리역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소각하였다. 이때 경복궁내에서 3일간이나 종이 탄 냄새났다고 한다.
사이토 마코토(1919~1927, 1929~1931년)는 3대와 5대 조선총독을 지내면서 재임 기간인 1922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고,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새롭게 조선사를 편찬하였는데 1938년까지 본문만 35권이었다.
이 과정에서 찬란했던 우리의 상고사(上古史)는 사라지고 단군은 신화화(神話化)되었다.
이는 이완용의 조카이며 조선사편수회의 대표적인 한국 사람으로 식민사학자인 이병도가 죽기 전 단군의 역사가 신화가 아닌 실존의 역사이며 일본이 왜곡하였음을 고백하였다.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소름끼치는 발언
아베 노부유키(1944~45년)는 마지막 조선총독으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인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자 일본으로 쫓겨 가면서까지 조선인에 대한 사과의 말은커녕 소름끼치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지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국민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고 착란적인 소리를 남기고 떠났다.

4장 맺음 말

“역사를 망각하는 자 다시 그 역사에 얽매이게 된다”는 경구를 우리는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 이 경구는 폴란드 아우슈비취 수용소기념관 입구에 게시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의 나치 히틀러는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하였다. 대전 말기에는 매일 4~5천명의 유태인을 잡아다
수용소에 넣고 지글턴이라는 독가스로 학살했다.
바로 그 자리에 이 경구가 게시돼 있다.
우리도 이와 같은 통한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인 600만 명을 학살했다.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전쟁터에 끌어다 죽이고, 강제 징용하여 탄광에 생매장해 죽이고, 소녀들을 끌어다 실컷 능욕하여 죽이고, 731부대에서 생체실험(生體實驗)을 해서 죽였다.
민족시인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 문인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죽였다. 이렇게 학살당한 사람이 600백만 명이다.(조정래의 작품 ‘누구나 홀로선 나무’에서)
아직도 일본은 그들이 지향해야 할 축소지향이 아닌 확대지향을 위해 아베 총리가 중심이 되어 군국주의(軍國主義) 부활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을 용서는 하되, 경계를 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통한(痛恨)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바로 알아야만 한다.

     조 복 전

    · 도포면 목우동 출생
    · 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전 경기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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