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수 웅

모든 생물체는 그를 둘러싼 환경과 타협해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살기 위해서는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가장 기본적인 적응이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환경에 적응할 신체조건이 다른 동물에 비해 너무 나약하다.
즉 태어나서 걷기까지 1년이 걸릴 정도로 성장 속도가 느리는 등 많은 제약이 따른다.
따라서 본능적 활동이 다른 동물에 비해 훨씬 뒤쳐진다.
예컨대 조금만 춥거나 더워도 견디지 못하며 독사나 호랑이만 만나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신체조건이 좋은 동물들은 생각과 관계가 닫혀 있고, 사람은 신체조건이 불완전한 대신 생각과 관계가 열려 있다.
즉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
그러니까 동물들은 자연에 순응하는 존재인데 반해, 사람은 자연에서 벗어나 자연과 싸우면서 자연 밖에 존재하는 ‘~답게 존재’다.
여기서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위대함이 나오는데, 그것이 곧 지성이다.
사람은 이 지성이라는 힘이 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나약한 한계를 뛰어넘어, 항상 본능대로 살아가는 다른 동물보다 한 차원 높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를 곁들여 보자.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됐나?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생각은 내 삶의 나침반인데, 주입식 암기식 교육 또는 조ㆍ중ㆍ동 때문에 생각이 고정되어 있다.
게다가 그 생각을 합리적으로 고집하는 동물이다.
진정한 자기 삶을 살자면, 생각을 바꿔 변화를 추구하고, 고정된 생각을 비판함으로써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반(反)해 물어볼 것은 자신의 생각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해 한 번뿐인 인생을 너무 허망하게 산다. 앞으로 어떻게 되고 싶다는 욕망 체계도 알고 보면, 내 가슴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출세 위주의 사회 구조에 따라 나에게 스며들어온 것이다.
자동차 운전에 비유해 보자. 왼쪽으로 가고 싶은데 혹 출세와 돈 때문에 오른쪽으로 운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성이란 본능과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 보자. ‘본능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에 적응해 살아가며, 과거를 반성하여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환경과 맞닥뜨려 그 자연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갈 뿐이다. 반면에 지성은 사물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의 대상(對象)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어 지적 활동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 실마리란, 1차원인 ‘나’에 ‘너’가 더해져 2차원이 되고, 여기에 너와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그’가 등장하여 3차원이 될 때, 3차원이 지닌 입체적 관계망을 분명히 알고 ‘그’가 존재하는 축에서 ‘나’를 대상으로 멀끔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이 곧 자기 객관화인데, 지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함을 의미한다.
이런 지적활동을 통해 얻은 지식에는 문제의 대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주위 환경과 적응해 나가냐에 따라 ‘상식’이나 ‘과학’ 그리고 ‘철학’ 등으로 나뉜다. 어쨌건 상식이든 과학이든 철학이든 간에… 아무리 돈밖에 모르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산다 할지라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세계란 뭐고, 사람이란 뭐며 진리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 걸까? 어떻게 사는 게 사람다운 삶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근본 문제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을 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 보고 싶은 본능을 억제할 수가 없다. 그게 바로 지성인의 자세가 아닐까?

     군서면 서구림리 生
  전 조선대·광주교대강사 (문학박사)
  전 전라남도문인협회장
  아시아문화전당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작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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