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산 마실길에 나서다(16)
소산리(蘇山里) 소흘마을

서호로에서 바라본 소흘마을 전경. 은적산 산그늘이 마을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다. 소흘마을은 소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밭소리’로 불린다.

소흘마을 지명유래

소산리는 소흘리와 송산리를 병합하여 소산리라 부르게 되었다. 이천서씨의 서희서의 증조가 해남에서 살다가 아버지 때에 영암의 송산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서희서는 정유재란 때 밤재와 은적산 전투에 아들과 함께 참전하여 많은 동지들을 잃고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강정(江亭)을 짓고 시(詩)를 읊으며 은거하였다.
후에 산골정으로 정자를 옮겨 소호정이라 했다.
처음에 정자를 지었던 터가 송산리 북쪽 동산에 남아 있으며 그곳은 ‘강정너머’라고 불린다.
소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서쪽으로 은적산이 자리하고 동쪽으로는 너른 들녘과 이어진다.  안소리 바깥쪽이라 하여 ‘밭소리’라 부르며 마을 앞에 주막이 있어 ‘소리객사’라 부르기도 하였다.
하동 정씨 정중록이 해남에서 유배 중에 풀려나 이곳에 와서 보니 봉화대를 중심으로 산수가 좋아서 살게 되었다.
100여년 전에 최정묵씨라는 분이 이곳에 터를 잡고 정착하면서 마을이 커졌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밭소리를 소흘(蘇屹)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흘(屹)은 산봉우리가 우뚝하여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런데 소흘의 한자 표기가 여러 개여서 구체적인 지명유래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밭소리 서북쪽 안에는 안소리라고 하는 연소정마을이 있다. 이곳에 연소형 명당이 있다고 전해진다.
 
소산리 소흘리 고인돌 떼

은적산 기슭의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소흘리 역시 여러 기의 고인들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영암군 향토문화백과사전을 보면 소흘마을 고인돌 떼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있다.
“소산리(蘇山里) 소흘 고인돌 떼는 3개 지역에 17기가 분포하고 있지만 나군은 현재 유실되어 없다.
가군 고인돌은 장천-태백 간 도로에서 소흘마을로 약 300m 못미쳐 도로 좌측으로 25m 지점의 독립된 숲속에 민묘(民墓)와 함께 4기가 있다.
나군은 장천-태백 간의 도로에서 우측으로 100m 떨어진 논 속에 2기가 있었으나 농지정리로 유실되었다.
다군은 소흘마을 동쪽으로 지나가는 장천-태백 간 도로에서 우측으로 30m 지점의 마을앞 구릉 상에 11기가 있다.
가군 고인돌 중 가장 큰 것은 길이 545㎝, 폭 415㎝, 두께 180㎝ 타원형의 덮개돌 밑에 장벽석 2매가 노출되어 있는 탁자식 고인돌이다.
노출된 무덤방은 길이 200㎝, 너비 80㎝, 높이 90㎝이다.
가장 큰 고인돌의 주변에 있는 규모가 작은 3기는 땅에 밀착되어 있어 형식을 알 수 없다.
다군 고인돌은 덮개돌이 원형과 타원형이 대부분이고, 11기 중 6기에서 받침돌이 확인되어 기반식의 군집임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고인돌은 길이 320㎝, 폭 210㎝, 두께 130㎝의 괴석형 덮개돌이며, 나머지는 1.5m 이상 3m 미만으로 소형이다.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가군은 탁자식 고인돌을 중심으로 민묘 주변에 자리하고 있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다군 고인돌은 일정한 형태가 없이 밀집되어 있고 그 방향도 뚜렷하지 않으며, 밭과 밭둑에 있어 경작으로 훼손되거나 기울어진 것이 많다.
또 영암수출영농법인 건물이 신축되어 일부 고인돌이 유실되기도 하였다.
마을앞 다군 고인돌은 지형적으로 칼 손잡이 부분에 해당하여 칼등으로 여기고 있으며 고인돌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면 칼의 위력이 사라져 마을의 기운이 약해진다고 하여 주민들이 잘 보호하고 있다.
소산리 소흘 고인돌 떼는 영암에서 대표적인 대형 탁자식 고인돌이 존재하며, 주민의 풍수지리에 의해 고인돌이 보존되는 한 사례가 되고 있다.”

광산김씨 효자문

신풍마을에서 서호로를 따라 월평마을을 지나 작은 언덕길을 휘돌아 넘으면 왼쪽에 소흘마을, 오른쪽에 송산마을이 보인다.
소흘마을 입구 오른쪽에 ‘광산김씨효자문’이라 새겨있는 조그마한 입석이 자리하고 있다.
좁은 농로를 따라 가보았더니 송산 저수지 바로 위쪽에 그의 행장을 기록한 비석 한 기와 단청된 효자문이 단아하고 쓸쓸하게 서 있다.
군서면 모정마을 출신으로 18세기 후반 지독한 흉년으로 군민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쌀 90석을 내놓아 서종면(군서면) 600가정을 구휼한 김구해의 아들 김기원(영조 을축년 7월28일생)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문이다.
그의 동생 김기양도 효자로 등록되어 모정리 세현문(삼효자문)에 행적이 새겨져 있다.
이로써 군서면 모정리 광산김씨의 후손인 김기원이 이곳 소산리 송산마을로 이사와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제동 마을

소흘리 마을회관을 지나 은적산 쪽으로 계속 길을 가다보면 장제동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소흘마을이 서호로와 바로 인접하여 비교적 너른 전답을 품고 있는 마을인 반면에 장제동은 은적산 자락에 바로 안겨있는 산골마을이다.
위쪽 산길을 계속 걷다보면 상은적산과 하은적산을 가르는 불치(佛峙)가 나온다.
부치개라고도 하는데 학산면 매월리로 넘는 고개이며 이전에는 이곳에 부처를 모신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
상은적산에서 하산한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으로 조그마한 원두막이 지어져 있다.
백운동 마을로 하산하려는 등산객들은 이곳 불치에서 다시 하은적봉을 향해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은적산이 해발 400m가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종주코스는 16km가 넘는다. 결코 만만하게 볼 산이 아니다.
불치를 넘어 서쪽 임도로 가면 학산면 매월리 놋점골마을로 이어진다.
정유재란 당시 우리 의병들과 왜군들이 치열하게 맞붙었던 전투현장이다. 바로 이곳 전투에서 의병장 전몽성, 김덕란, 유장춘, 김덕흡 등과 수많은 사람들이 전사했다.
불치 원두막에 앉아 있으면 들리는 게 새소리와 솔바람 소리이다. 한적하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 한때는 화살과 돌이 난무하고 칼과 창이 부딪치며 서로를 찌르고 베며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산골짜기를 울렸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복 중의 복은 시대를 잘 만나는 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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