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수 웅

요즈음 아이들은 인생을 가짜에서 시작한다. 예컨대 아프리카 태생이 아닌 이상 진짜 사자를 보고나서 사자 그림을 그리는 아이는 없다. TV나 영화에서, 그림책에서 사자를 보고 그것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러고 나서 어쩌다 동물원에서 진짜 사자를 보면, 그들의 머리 속에 있는 사자는 시뮬라크르(*TV에서 시뮬레이션 한다는 말이 바로 시뮬라크르에서 나왔다. 이때 ‘시뮬라크르’는 ‘이미지’와 비슷하다. 이 이미지 시대란 매체의 발달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들이 등장함을 이른다. 또 이미지들의 지각 방식이 색다름도 의미한다. 이를 광의로 시뮬라크르의 시대라 볼 수 있다. 시뮬라크르는 현대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가장 명료하게 나타내는 개념이다. ‘시뮬라크르’라는 말을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서 음역한 것인데, 그 개념은 이야기 되는 방식이나 맥락에 따라, 이미지와 연관될 수도 있고, 한 순간에 벌어지는 사건이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바뀌는 감성적 언표들과 연관되어 논의될 수 있다.*)가 진짜고 진짜 사자가 시뮬라크르가 된다. 완벽하게 시뮬라크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디 어린이들뿐인가? 틈만 나면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책상머리에 앉자마자 컴퓨터 모니터와 씨름하는가 하면, 거실 쇼파에 앉기가 무섭게 TV부터 켜고 주말이면 극장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즐기는 어른들의 일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말이다.

이런 시뮬라크르 문화가 존재론적으로나, 미학적으로는 흥미진진한 것을 많이 보여주고, 환각체험을 통해 창조적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며, 심지어 의학에서 ‘공황장애’의 치료법으로도 유용하게 쓰이지만, 상업적인 면에서는 우리 의식을 판타지로 마비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들끼리 만나면 가족이나 이웃, 친구 등 진짜 사는 이야기는 안 하고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TV이야기, 영화이야기, 스마트폰 게임이야기만 한다.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환상(판타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진짜 역사와 상관없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되는 역사드라마를 보고 그게 실제 역사인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그러니까 현대 사회의 본질은 거대한 판타지 산업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제 판타지가 판타지로 느껴지지 않는다. 뭐가 판타지고 뭐가 실물인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실감이 안 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이미지는 실재와 무관한 순수 시뮬라크르가 된 것이다. 실재를 감췄다는 이야기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다. 이미지와 실재가 구분되어야 실재를 반영했느니 실재를 왜곡했느니 실재를 감췄느니 하는 물음이 가능한데, 그런 말들이 필요 없이 이미지와 실재의 구분 자체가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시뮬라크르는 무엇인가를 흉내 내고 감추고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는 기호이다. 시뮬라크르의 시대는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시뮬라크르를 만들어 낸다. 미국 자체가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생겼다. 그러면 사람들이 디즈니랜드를 보면서 그 바깥은 디즈니랜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 자체가 미친 곳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정신병원을 지었다. 세상이 정신병원인데 정신병원을 지음으로써 정신병원 바깥은 정신병원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마치 인디언 살해를 감추기 위해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든 것과 같다.*) 가짜로 완벽하게 통제와 관리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걸프전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듯 모니터를 보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이런 식의 변화는 세계라는 개념 자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래서 가상세계(시뮬라크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현대문명의 이해에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군서면 서구림리

전 조선대·광주교대 강사(문학박사)

전 계간문학춘추 편집인·주간

전 전남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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