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산 마실길

모정마을 검주리쪽 들녘에서 바라본 학파동마을 전경. 서호강을 사이에 두고 군서면 모정리와 경계를 이룬다. 마을 앞쪽으로 학파다리가 쭉 이어지고 있다.

서호 성재리~군서 양장리 제방쌓아 만든 간척지 땅

영암 최고의 부호 현기봉·현준호 부자 심혈 기울여

 

지명 유래

학파동은 무송 현준호의 부친인 현기봉(玄基奉)[1855~1924]의 호를 그대로 사용하여 만든 마을이름이다. 학파동 지명유래는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에 제방을 쌓아 만든 간척사업과 궤를 같이하며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운영했던 학파농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학파농장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영암 최고의 부호였던 현기봉과 현준호 부자의 내력을 먼저 알아야 한다.

현기봉은 학산면 출신으로 자는 치도(致道), 호는 학파(鶴坡)다. 일제 강점기 유지로써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여러가지 친일 행적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 두 분은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공로자명감에 나란히 등재되었다. 당시 어떤 일들을 했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기록으로 보여 여기에 번역본을 가감없이 소개한다.

 

학파 현기봉(1855~1924) 일세의 대덕(大德), 드물게 보는 성자였던 현기봉씨는 그가 세상을 떠나자 원근의 관민이 애도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장례에 모인 사람이 무려 10만을 헤아려 그 때문에 광주의 거리를 메워 사실상 도민장이었다고 한다. 그 분은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사람으로 여생을 전남 목포에서 보냈는데 고희(古稀)가 되어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는 1855년생으로 성균관생원을 시작으로 영암군 향교 장의, 동군민의장(同郡民議長), 동군양약소도약장(同郡鄕約所都約長), 무안부조선민단장(務安府朝鮮民團長), 영암군 사립구림학교장, 무안군잠업전습소장, 목포부참사, 목포신흥철공주식회사 사장, 광주농공은행취체역, 명치신궁봉찬회조선지부위원(明治神宮奉讚會朝鮮支部委員), 목포부 무안군 연합물산품평회 협찬회부회장,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제국군인 후원회 특별회원(帝國軍人後援會特別委員), 목포사립유치학교장, 경성해동물산주식회사 사장, 목포창고주식회사 사장, 전라남도 참사, 전라남도평의회원 등을 역임하여 이들 공직의 이력을 들자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다시 중추원 참의로 추대되었는데, 명치·대정(大正)에 걸쳐서 다년간 공사에 분주하여 공익에 힘썼고, 지순 지성한 고결한 인격과 심후한 인협(仁俠)으로써 사회국가에 진력하여 인심을 감동시켰음이 심대하였다.

그가 행한 일단을 보면 명치21, 2(1888,9)의 대기근에 수백석의 쌀을 궁민에게 베풀고 그 후 매년 백석 이상을 빈민에게 지출하는 것은 연중행사였다. 명치42(1909)년에는 2,000마지기(斗落)의 전답을 원근의 척족에 나눠주고 명치42(1909)년부터 대정13(1924)년까지 공공사업에 기부한 금전 또는 전답은 대단히 많았다. 대정3(1914)년경 무안군 비금도가 2년에 걸친 흉작으로 섬 안의 토지 전부가 관유민유의 다툼이 벌어져 도민이 위기에 처하자 천석의 벼를 풀어 도민의 위급을 구하고 도민의 간청으로 수천 두락의 전답을 사들였으나 그 후 민유로 확정이 되자 자진하여 원가로써 반환하여 전도주민의 감격이 극에 달하여 여러 곳에 기념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대정6(1917)년 명치신궁봉찬회장(明治神宮奉讚會長);봉찬 신사등의 사업에 찬조함)으로부터 헌금에 진력한 이유로 감사를 받았고 대정8(1919)년 소요(3·1운동)때에는 당국의 시정방침에 관하여 위촉되어 나주, 무안, 제주도의 여러 군에서 강연을 하였는데 그의 강연장에서만 아무런 소요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지금도 후인들이 경복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더구나 조선인의 생활안정에 곤해서는 종종 당국에 직언을 하는 등 그의 공명정대한 식견을 짐작할 만하다.

집에 있어서는 효제(孝悌)를, 밖에서는 인협(仁俠), 구민제세(救民濟世)를 근본으로 시종한 성현의 높은 선비였다. 오늘날 도처에서 입에서 입으로 덕을 기리고 후세에 남긴 영예가 더욱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로서 그 공이 지대하다 할 것이다. 그의 호는 학파(鶴坡), 자는 치도(致道)라 하고 글씨는 청아하였다. 호남은행두취(頭取:은행장) 중추원 참의 현준호씨는 옹의 영식으로 선고의 뜻을 이어 명망 높은 전북제일류의 인물로 사업계나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있다.<출처: 1935년 조선총독부 조선공로자명감 번역본/ 번역: 심정섭 향토사학자>

 

현기봉의 아들 현준호(1889-1950)조선의 곡창 전남의 금융통제를 담당하는 호남은행은 창립부터 경영에 이르기까지 현 두취(은행장) 현준호씨의 활약에 의하여 유지된다. 동행의 창립은 대정9(1920)년이다. 은행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지방민에 대하여 은행의 제도에서 거래의 방법까지 설명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 대해서 귀찮아하지 않고 친절하게 민중을 대한 그의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노력이 마침내 이루어져 호남은행의 오늘의 대 세력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대전 후 내습한 재계의 패닉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동행의 기초는 반석 위에 구축된 것이다. 이로써 그의 경영이 견실하고 튼튼하게 진척되어 내용이 충실한 은행으로서 조선 재계에 만장의 기염을 토하는 이유를 알 것이다. 그는 모든 방면에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다. 준민하고 중후하여 초대면의 사람에게도 십년지기와 같은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온정의 소유주로 어떤 사람이 평한 것처럼 「나이에 비해서 노숙한」곳이 있다. 그처럼 인물도 수완도 원숙하고 의젓하게 쑥쑥 뻗어나는데 틈도 없고 무리도 없는 것이 그의 두뇌의 예리함을 느끼게 한다. 아무리 원만한 사람도 적을 갖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데 영준(英俊)한 그와 사람은 많은 적을 만드는 것인데 그의 경우는 달라서 전혀 적이 없다. 모두가 내편이고 후원자이다. 호남은행은 현 두취가 짊어지고 서있다 할 것이다. 그는 중추원참의 도회의원, 기타 각종 조사위원에 추대되어 전남을 대표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고 일반으로부터 자부(慈父)처럼 경애되고 있다. 그가 국사(國士)로서의 품격은 그런 속에서 나타나 정계·재계에서 활약하는 바 매우 많은 조선의 주역으로서 진력한 공적은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움직일 수 없는 지위를 구축한 그는 실권을 쥐고 은행실무는 김전무에게 일임하고 각 방면의 공직자로서 동분서주, 일반민중의 복리증진과 지방의 발전에 진력하고 있으나 가난한 우수학생의 교양에 힘을 기울여 이미 사재 30만원을 투자하였다 한다. 그의 힘으로 이미 변호사가 되고 사법관이 되고 혹은 관계, 실업계에 활약하는 이가 상당히 있다. 이 방면에서 사회에의 공헌도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선고(先考)는 현기봉씨고 대정8(1919)년 만세 소동에는 세력이 있는 전남의 6군에 한사람도 가담하는 사람이 없었던 국사(國士)였다. 그 피를 이은 그가 선고의 뜻을 이어 열렬한 국사로서 큰 공을 세운 것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할 것이다. 그는 또 한 수해를 만난 소작인에 대해서는 1년간의 소작미를 면제하는 인정미 넘치는 사람이다.(현주소 전남 광주읍)<출처: 1935년 조선총독부 조선공로자명감 번역본/ 번역: 심정섭 향토사학자>

 

*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이란?

일제시대 반민족 인사들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조선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이 2004년 3ㆍ1절 제85주년에 맞춰 광주지역 소장가인 심정섭(61ㆍ수필가ㆍ광주 동구 학동)에 의해 공개되었다. 이 책은 일본이 패망하면서 파기했거나 수록 당사자나 후손에 의해 숨겨지면서 국내 학계에서도 공개되지 않은 희귀본으로 알려졌다.

조선총독부가 1935년 일제통치에 적극 협력한 민ㆍ관 공로자를 영구 기록하기 위해 출간한 것으로 총 1,808쪽에 이르는 4.6배판의 일본어 양장본이다. 모두 6부로 구성된 이 책의 핵심부분은 2부 ‘조선공로자명감’과 3부 ‘시정 25주년 표창자명’으로 일본인 2,560명과 조선인 353명 등 모두 2,913명의 명단과 친일행적, 주요 인물의 경우 사진까지 수록돼 있다.

 

글/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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