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서

나는 내 고향 ‘매월리’ 를 사랑한다. 매월리에 버스를 넣을 때 전남도 관계자가 ‘광주∼매월리’ 운행 표지판은 안 된다는 걸 기어이 우겨서 관철시키는 그 정도로 매월리를 사랑했다. 당시에 ‘매월리’ 라는 지명은 전남도내에 세 군데 있었다. 해남(화원면)과 곡성(입면), 광산(서창면)에 한문도 똑같은 ‘매월리(梅月里)’가 있고 보니 광주에서 어느 지역 ‘매월리’로 가느냐 하는 것 때문에 전남도는 ‘매월리’ 앞에 ‘영암’ 을 넣으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건 “버스기사에게 물으면 될게 아니냐?”며, 한사코 광주에서 매월리로 직행한다는 의미의 표지판만을 고집했다. 그것은 ‘매월리’를 ‘광주’와 같은 급으로 올려놓으려는 생각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런다 해도 ‘매월리’가 ‘광주’ 만큼의 위상으로 올라가진 않을텐데 그 땐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유를 모를 정도로 나는 ‘매월리’라는 이름 석 자에 집착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바깥사람들이 ‘매월리’ 라는 이름을 너무 학대(?)하는 데서 오는 반발 심리에 그런 고집이 생겨났을는지도 모른다.

가끔 “고향이 어디냐?” 물어오는 향우들에게 ‘매월리’라 했다가 “오메 그 산굴 청이어?”하는 소리를 들을 때가 가장 기분이 나빴다. 정말 듣기가 싫은 소리였다. “같은 영암사람이면서 산골이면 어떻고, 읍내면 어때서 그리 차별(?)을 하는지가 몹시 서운했다. “산골이니까 산골이라 하겠지.”하고 접어 생각하려 했다가도 막상 듣고 보면 사람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학산면 용산리 신복촌이었지만 난 한 번도 교통 좋은 신복촌이 고향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매월리로 오시는 바람에 자랄 때의 추억이 서린 고향만을 자랑하고 살아왔다. 앞서 쓴 글을 읽은 어느 친구가 “그런 험한 데가 고향이었어?”하길래 “그런 소리 마! 지금은 남악 신도시 전남도청 소재지로부터 자동차로 10분 거리이고 훤히 트인 마을 앞 영산강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능가하는 무영대교가 있으며 도심을 떠나 살려는 전원주택 1급 후보지가 내 고향 매월리야!”하고 자랑했더니 “그러냐?”며 놀랜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매월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고향의 산천이 어떻고 산짐승들이 많아 겨울철에는 맘만 먹으면 고라니, 노루쯤은 몇 마리씩 잡을 수 있는 곳이 내 고향이라 자랑했다가 친구처럼 사귀게 된 공직자 Y가 있었다. Y고향 또한 나와 같은 환경의 두메산골이다. 그런 Y가 어느 날 신문사를 찾아왔다.

“박형! 내가 초임 군수만은 꼭 고향으로 가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되고 영암으로 가게 되었어. 그러니 박형의 생각을 얘기해봐.” 내 생각을 말하라는 것은 내가 늘 자랑했었던 그 고향에 군수로서 뭐 도와줄게 없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덧붙여 “박형 고향이 내 고향 아니겠어?”하는 말에는 가슴 뭉클한 고마운 정이 느껴졌다. “지금 내가 고향의 사정을 잘 모르니 매월리에 가서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도와주라.”했다.

얼마 뒤 신임 영암군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형! 취임식만 마치고 바로 매월리를 다녀왔어. 짚차를 타고 갔기에 망정이지…못갈 뻔 했어. 길이 너무 험해…. 군수가 마을에 온 건 처음이라나? 매월리 주민들은 마을 진입로를 포장해 달래. 군수 재량사업비 한도(2천만 원)가 얼마 되지 않아 그 정도밖에 도와주지 못함을 이해하시라 사정, 사정했어. 미안해!”하길래 “군수님 최고! 우리 군수님 정말 고맙습니다.”하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끊질 않고 미적거리며 목소리를 낮추더니 “박형! 개천에서 용 났데 그려 -.”하고 끊었다.

Y고향도 밤이 많이 생산되는 광양의 어느 깊은 산골쯤으로 알고 있던 터라 듣는 순간 “뭐라고…? 지나 내나 같은 촌놈이면서 날보고…?”하다가 그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Y와 내가 함께 나눴던 고향 자랑은 이런 것들이었다.

꼴을 베러 친구들과 산에 올라 ‘낫치기’를 하다가 어둑어둑해지면 서둘러 꼴을 망태의 반도 못채우고 꾸중들을까봐 집 담장을 뛰어넘던 일, 방학철이 되면 이웃 마을에서 ‘닭서리’를 한 게 들통이 나 순경이 범인을 잡으러 마을로 온 걸 피해 숨어 다니던 일, 토끼나 노루를 잡으려면 산 위로부터 산 아래 내리막길로 몰아야만 쉽게 잡을 수 있다는 서로의 경험담. 여름철 별미였던 수재비를 훔쳐 먹기 위해 한여름 밤 이집 저집 장독대를 뒤지다가 들키는 바람에 도둑으로 오해받던 일 등, 시골에서는 흔히 있었던 일이었지만 Y와 나는 인심 좋은 산골에서 자란 탓에 고향을 자랑하는 순간만은 소꿉장난 친구가 되어 있었다.

 

학산면 매월리

전 한국일보 기자

5·18광주민중항쟁 관련 강제해직

전 무등일보 주필,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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