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마을 5

정유재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은적산 전경. 우뚝 솟은 봉우리가 상은적봉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적들이 해암포(지금의 석포리)를 통해 진격해오자 전몽성, 서희서, 김덕란, 김덕흡, 유장춘 등의 의병장들이 은적산에 진을 치고 끝까지 항거했다. 이들 중 서희서만 살아남고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은적산에서 활약한 의병장들과 의병들의 이야기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소호 서희서가 쓴 창의공(倡義公) 실록(實錄) 덕택이다. 이것은 1599년 봄에 함께 왜적과 싸웠던 의병장 김덕란에 관한 글인데, 치열했던 은적산 전투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전몽성과 김덕흡 의병장에 대한 행적도 이 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1836년 심계석이 지은 창의공 유사(遺事)도 서희서의 글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김덕란이 평소에 논어에 나오는 세한송백(歲寒松柏) 대목을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소나무와 잣나무들을 정자 곁에 심고 그 정자를 함취대(含翠臺)라 하고 연못을 파고 물을 담아 연꽃을 심어 수홍지(守紅池)라고 하였다. 또 집을 지어 흥유제(興儒齊)라 하고 금여촌의 자제들이 글을 외고 읽는 서당으로 사용하니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흥유동(興儒洞)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으로 보건데, 김덕란은 무인이 아니라 유학을 공부하는 전형적인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창의공 실록에 기록된 의병장 김덕란

이름은 덕란(德鸞 1557~1597)이며 자는 정서(廷瑞)이고 호는 여촌(輿村)이다. 그의 선조는 김해김씨로 예조판서를 지낸 요의 6세째 손자이며 남평 현감을 지낸 세량의 증손이다.

김덕란은 어려서는 영암군에서 살았으며 후에는 강진의 금여촌에서 교거(僑居)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고 부모 섬기기를 잘하였으며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항상 논어의 “추운 겨울을 만나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고 꿋꿋함을 알 수 있다”는 구절을 읽을 때면 탄식하면서 “선비가 항상 힘써야 할 것은 충효뿐이니 성인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고 잊지 말아야 된다”고 다짐하였다.

임진왜란에 많은 왜구들이 쳐들어와 영남과 호남을 빼앗기고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니 왕이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나라의 위태로움에 울분을 못이겨 눈물을 흘렸다. 고태헌(고경명 1533~1592)이 정의를 위하여 스스로 군대를 일으키자는 격문이 강진에 도착하여 임란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였다. 비록 나라가 침략을 당하여 몹시 혼란하고 어수선할 때이었지만 사람이 행하여야 할 올바른 예와 도를 실행하고 금여의 내동에 묻은 뒤에 밤낮으로 향불을 올리면서 소리를 내어 섧게 울기를 평소에 나라가 평온할 때처럼 하였다.

왜적들은 김덕란이 그의 아버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키던 곳 아래를 지나가다 잡아끌고 가려고 하였다.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삼베옷을 입은 덕란은 손으로 가슴을 치고 발로 땅을 구르면서 조금도 적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왜적들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공경하는 뜻을 표하고 떠나니 마을사람들은 “김덕란은 참으로 효자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처럼 예의를 다하고 삼년이 되어 상복을 벗으니 정유재란 때로 왜적들이 더욱더 극성을 부렸다.

마침내 김덕란은 영암에 살던 전몽성(전현감), 유장춘(전첨사), 서희서(생원), 유희춘(학생), 김덕흡(학생), 서건(학생, 서희서의 아들) 등이 함께 올바른 도리를 부르짖고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선비 70여명을 모아서 패를 나누어 밤재를 지켰다. 밤재는 강진과 영암의 경계에 있어 서로가 만나는 길이며 왜적이 오고 가는 중요한 곳이다. 길의 곁 좁은 곳에 숨어서 쳐 죽인 왜적의 수가 100여명이나 되었다. 또 의병 200여명을 모집하여 월출산의 중요한 곳을 지키면서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길을 막는 한편 의병들을 더 많이 모아서 그들이 적을 쳐부수어야겠다는 싸움에 대한 기세를 높이고 위로는 조정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의병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려고 하였다.

이때 왜적들이 타고 온 배가 은적산 서쪽에 있는 해암포(지금의 석포리)의 물위에 가득차 있다는 소식이 전해오니 의병이 있는 곳과는 그 거리가 10리 정도 되었다. 김덕란과 전몽성은 급히 의병을 이끌고 은적산으로 가서 10개의 부서로 나누어 지형의 험난한 곳에 숨어서 오는 적을 무찌르니 왜적들은 두려워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의병들을 한데 모아 은적산 아래에 있는 놋점골(유점동)에 머물고 있었다. 조금 뒤에 왜적들이 해암포에서 갑자기 쳐들어와서 김덕란과 전몽성이 의논하기를 “오늘의 싸움은 계획을 잘 세워서 싸워야 될 것 같다”하고는 의병들을 두 패로 나누었다. 전몽성, 유장춘, 서건 등은 머물고 있던 유점동의 왼쪽 벼랑을 맡고 김덕란, 서희서, 김덕흡, 유희춘 등은 오른쪽 벼랑을 맡아 늙고 어린 사람들로 하여금 벼랑의 뒤쪽인 숲속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많은 의병들이 있는 것처럼 속이고 모두가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면서 힘껏 싸우도록 마음과 기운을 북돋우니 왜적들이 물러갔다.

그 다음날 아침 많은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오니 의병 모두가 두려워 할 때에 김덕란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면서 말하기를 “정의를 부르짖고 의병에 참여한 것은 마땅히 죽음 뿐이다”라고 한 뒤에 의병들을 은적산 꼭대기로 이동시켰다. 은적산의 남쪽과 북쪽은 모두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라 왜적들이 기어오를 수가 없지만 동쪽과 서쪽은 쳐들어오기가 쉽게 되었다.

김덕란과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한 부분씩 맡아 늙고 약하여서 혼자 힘으로 활을 잡아당길 수 없는 사람들은 돌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산꼭대기에서 밑을 향하여 화살을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왜적들이 기어오르질 못하였다. 잠시 뒤에 왜적들은 수많은 무리를 지어 산을 기어오르면서 앞을 가로막고 뒤를 에워싸고 쳐들어오니 수백 명의 의병들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쏘아댈 화살과 굴러 내릴 돌이 바닥나니 그 모양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전몽성이 첫 번째로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고 나니 김덕흡은 싸움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적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죽은 조상에게 부끄러울 게 없다”하고는 손에 칼을 잡고 싸우다가 죽음을 당해 쓰러졌어도 그의 손에는 칼이 꼭 쥐어진 채로 있었다.

김덕란은 모든 의병들에게 말하기를 “전몽성과 김덕흡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기기는 어렵게 되었으며 어찌 나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칼을 빼어들고 몸을 날려 적중에 뛰어들어 싸우다 죽으려고 하였다. 모든 의병들은 김덕란을 에워싸고 울부짖으니 왜적들이 김덕란을 붙잡았다. 김덕란은 태연한 빛으로 꼼짝 달싹하지 않고 입으로 왜적들을 꾸짖다가 끝내는 죽음을 당하니 이때는 1597년 9월 25일이었다.

오호라! 김덕란은 한갓 배우는 선비로 성인의 도리를 실행하고 국가의 어려움을 만나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니 옛 성현의 업적에 비겨도 부끄러울 게 없다.

아! 슬프도다. 그의 아들 진방은 나이가 겨우 11세로 작은 아들 진국과 함께 외로이 고아가 되어 외갓집에서 보살핌을 받고 자라고 있다.<1599년 봄. 함께 의병에 참여한 서희서가 삼가 쓰다>

의병장 김덕란 가족들의 비애

의병장 김덕란이 은적산 전투에서 40세의 나이로 순절하자 그의 아내인 청주 한씨는 죽은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살아 생전에 입었던 남편의 옷으로 신(神)에게 그 사정을 아뢰고 눈물을 흘리면서 금여 내동의 동남쪽에 위치한 방화동의 동쪽에 묘를 만들었다. 이른바 초혼장(招魂葬)을 지낸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헤어지는 것도 서글픈 일이지만 시체도 없는 묘를 만들고 나니 사람으로써는 차마 못할 일이라 너무도 크게 서러워하다가 훌쩍 세상을 떠나니 남겨진 것은 두 형제뿐이었다. 천애의 고아가 된 11살내기 진방과 그의 아우 진국은 금여의 내동에 살고 있던 외갓집에서 부모를 그리워하면서 자라게 되었다.<탐진향토문화연구회>

 

글/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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