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석 홍

‘약무호남시무국가’는 우리 귀에 상당히 익숙한 글귀다. 이순신 장군의 서한문 중에 들어 있는 글귀다. 호남이 아니라면 나라의 존립이 어렵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84년 10월 전라남도 도지사로 부임하여 이 글귀를 처음 접한 것은 그 이듬해이다. 광주상공회의소 신태호 회장께서 글씨접시를 가지고 도지사실에 들렸다. 가지고 온 접시를 꺼내 보이면서 이순신 장군의 글귀인데 의제 허백련 선생께서 쓰신 글씨라 했다. 이를 선물용으로 활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약무호남시무국가’라고 네 자씩 두 줄로 내려 썼으며, ‘정유재란 중 서한 일절’이라고 씌어 있었다. 매우 좋은 글귀라고 생각했다. 그 뒤 신태호 회장께서 글씨접시 3백개를 만들어 보내와 방문객 선물로 썼다.

마침 광주공항 청사가 비좁아 새로이 청사를 짓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청사가 마무리 될 무렵 손수익 교통부장관께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전남은 예향이니 새 청사 귀빈실에 그림과 글씨, 도자기 등을 마련해서 비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 고장의 예술품을 전시해 예향으로서의 전남을 홍보하는 계기가 되겠다 싶어, 그림은 동양화가이면서 산수화에 능한 아산 조방원 선생에게, 글씨는 광주예술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서예가 장전 하남호 선생에게 의뢰하고, 도자기는 강진 청자를 전시토록 했다. 장전 선생에게는 글씨접시를 보내서 ‘약무호남시무국가’를 쓰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비치한 것이 1986년 여름이다.

그 뒤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대통령께서 광주에 오셨다. 비행장 귀빈실에 게시된 ‘약무호남시무국가’ 글귀를 보시고, 염주실내체육관 연설에서 이를 인용하시면서 호남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공식석상에서 이 글귀를 인용한 처음 사례이었다. 이어서 정치인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호남의 중요성을 언급할 때면, 이 글귀를 인용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널리 파급되었다.

나는 이 글귀가 누구에게 보낸 서한문 중에 들어 있는지 늘 궁금했다. 그러던 중 2007년 4월 왕인현창협회 이사회를 마친 뒤, 현삼식 감사로부터 ‘사직공(휘 윤명)파세덕소람’(司直公(諱 允明)派世德小覽)이라는 단행본 한 권을 받았다. 서울에 돌아와 차분히 살펴보던 중, 이순신 장군의 서한문이 그 책자 속에 실려 있어 ‘약무호남시무국가’가 눈에 번쩍 띄었다. 여기에 이 귀중한 서한문이 실려 있다니, 참으로 흐뭇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계사년(癸巳年 1593년) 7월 16일, 이순신 장군께서 현지평(玄持平)에게 보낸 편지 원문 속에 이 글귀가 들어 있었다. 현지평께서는 안부서신과 군사에 필요한 마포, 면포 등 물품을 이순신 장군께 보냈는데 이에 대한 고마움의 답신으로 보낸 서한문이다. 여기에는 “가만히 생각컨대 호남은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이니 만약에 호남이 없다면 이는 국가가 없어진 것임으로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겨서 바닷길을 차단할 계획입니다”라고 씌어 있다. 호남의 지위를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현지평은 현덕승(玄德升 1564년~1627년)으로, 천안 출신이며 이순신 장군보다 19세 아래이다.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인 지평(사헌부 정5품)으로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이 보낸 서신으로 되어 있다. 편지 내용과 말미에 ‘척하’(戚下)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친척관계임을 알 수 있다. 정조 19년(1795년) 실학자 유득공이 왕명에 의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였다. 이를 번역한 이은상 선생은 ‘척하’라는 표현으로 보아 충무공의 외가쪽 친척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두 분은 가까운 사이로 이미 서신을 주고받는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는 것은 기록뿐이다. 세월이 흐르면 기록에 없는 것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모든 것은 반드시 글로 남기고, 자료를 잘 보관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것이 역사를 보존하는 길이다. 난중일기가 남아 있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으며 서한문들이 전해져 당시 이순신 장군의 교유관계와 생각의 깊이를 오늘날에도 이해할 수 있다. 현지평(14세)과 현건(15세)을 선대로 모시는 현삼식(28세손) 감사께서 귀중한 역사적 자료들을 잘 보존하여 자랑스러우며, 이를 포함한 단행본을 펴내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해준데 대하여 경의를 표한다.

·서호면 장천리 ·전 전남도지사 ·전 국가보훈처장관 ·왕인박사현창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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