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집

▲영암공원 내 3.1운동 기념탑(왼쪽 사진)과 구림 3.1 독립만세 기념비.

--------일제침략에 저항해 의병활동 활발했던 의절의 고장 자리매김

--------조극환 등 뜻있는 인사들 영암 장날에 맞춰 만세운동 주도해

--------구림 회사정서 집결 독립만세 외치며 1천여명 영암읍내 진출

 

#전통적 의병활동 중심지

 

전통적으로 영암군은 호남지역 교통의 요지이며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 자본에는 주요한 침투 대상이었고, 그래서 강력한 경제적 침략의 위협 아래 놓여 있었다. 게다가 일찍 사족(士族)의 문화가 발달하고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이 활발한 고장이었던 만큼 항일운동의 전통도 뿌리가 깊었다. 따라서 3·1 운동의 소식도 비교적 일찍 접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초 영암군에도 3·1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조극환(曺克煥)·최한오(崔漢五) 등 영암읍과 군서면 구림리의 뜻있는 인사들이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시위를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결국 4월 10일 영암읍 장날에 맞추어 아침 일찍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오전 9시 영암 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을 비롯한 지역민들이 집결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또한 같은 시각에 회사정(會社亭) 광장에서도 학생들과 군민들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조극환(1887~1966)은 영암읍 교동리에서 창녕 조씨(昌寧曺氏)인 아버지 조병헌과 어머니 김금옥의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영암의 향리 가문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안이었던 그는 1919년 영암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후 목포를 주요 활동무대로 하여 노동운동과 청년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조극환은 1908년경 한성 사범 학교를 마친 뒤 영암에 내려와 영암 보통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영암읍과 구림리의 3·1 운동을 연계하여 4월 10일에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9월 17일 주동자 중에 가장 무거운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만세시위 시도에 실패

 

당시 조극환은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영암에 내려와 있으면서 송내호(宋乃浩) 등이 주도한 비밀결사인 ‘수의 위친계(守義爲親契)’에 가담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극환이 주동이 되어 3월 11일 영암 장날에 맞추어 만세 시위를 시도하였으나 일본 관헌이 눈치 채고 감시를 강화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3월 20일에도 밤에 산에 올라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는 산호(山呼) 투쟁을 몇 곳에서 벌이기도 하였으나 산발적인 투쟁으로 그쳤다.

이에 영암읍의 조극환·정학순(鄭鶴順)·최민섭(崔旼燮)과 군서면 서구림리의 최한오·박규상(朴奎相)·조병식(曺秉植)이 연락하여 영암읍내와 구림리 두 곳에서 동시에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4월 10일 장날을 거사일로 잡고 구림리의 간죽정(間竹亭)을 임시 연락처로 정하였으며 군서면 서기로 있던 최민섭·김재홍(金在洪)이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 선언서」와 『독립신문』, 태극기를 인쇄하는 등 시위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영암·구림 동시에 시위

 

4월 10일 아침 9시 영암읍과 구림리에서는 보통학교 학생들과 지역민들이 동시에 모여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회사정 광장에서는 영암보통학교 학생들과 읍민들이 집결하였고 박규상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자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가」를 부르며 영암읍내 중심가로 진출하였다. 이내 시위대는 장을 보러 온 사람들과 합세하여 1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최한오·조극환·박규상·정학순·김민규(金敏圭) 등이 시위행진을 지휘하였다.

또한, 최기준(崔基俊)·조병식은 아침 9시 정각 구림 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학생들과 지역민들을 불러 모으고 만세를 부른 다음 300여 명이 대열을 지어 행진하여 면사무소에 쇄도하는 등 관내를 누볐다.

4월 10일의 만세시위가 벌어진 이튿날인 11일부터 일본 경찰은 시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영암읍과 구림리의 지사와 청년, 학생 약 30여 명이 끌려갔으며 그 중에서 20여 명은 5개월에서 2년간 징역형을 살았다.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던 박규상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항일의병 투쟁 혼 지속

 

3·1 운동이라는 전국적이고 전 민족적인 항일항쟁은 한 민족으로서는 민족의 실체와 독립의 가능성을 실감할 수 있었고, 일본으로서는 식민지 통치정책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계기로 작용하였다. 또한 영암지역의 3·1 운동은 항일의병 투쟁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이후에 전개되는 민중 중심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시초가 되는 사건이었다.

 

이후 영암에서는 일제 강점기 영암출신 독립 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자 영암공원 내에 3.1운동 기념탑이 세워졌다. 이 기념탑은 1919년 4월 10일 영암에서 전개된 3·1 독립만세 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이와 관련된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기념비건립 위원회(위원장 김준혁)가 동아일보사와 공동으로 건립하였다. 동아일보사의 3·1운동 유적지 기념비 건립사업의 후원을 받아 건립되었으며, 1984년 4월 10일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구림에서도 구림청년계가 주축이 되어 2001년 4월 13일 군서면 서구림리 도기문화센터 내에 ‘구림 3.1운동 기념탑’을 세워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념하고 있다.

전남서부보훈지청(지청장 조춘태)은 지난해 8월을 맞아 ‘이달의 현충시설’로 ‘구림 3.1운동 기념탑’을 선정한 바 있다.

문배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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