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산 마실길에 나서다(12)-신풍(新豊)마을 ②

 

봄비 내리는 신풍마을 소호정 풍경. 옛 영화는 온데 간데 없이 찾는 이 한 명 없고 정자 주변의 큰 나무들만 쓸쓸하게 비를 맞고 있다.

 

신풍마을에 내리는 봄비

절기가 우수인지라 시절에 걸맞게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신풍마을 가는 서호로에도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다. 거센 바람이 지나간 뒤여서 그런지 정오가 지난 오후에 내리는 비는 몹시 순하게 느껴진다. 영풍마을을 지나 모개나무재를 넘는데 도로에는 오가는 차량 한 대 없고 마을 앞 너른 들녘에도 봄을 준비하는 농부 한 명이 없다. 이윽고 신풍마을의 자랑인 소호정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펴보았다. 정자 앞 커다란 은행나무와 동백나무 세 그루가 묵묵히 서서 비를 맞고 있었다. 고요하면서도 쓸쓸하다. 혹시 마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이 골목 저 골목을 거닐면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 뒤에 자리한 대박산에서 엷은 운무가 피어오르고 마을 한복판의 600년 된 당산나무가 우람하게 팔을 벌린 채 마을 언저리를 감싸고 있다. 낯선 나그네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개들이 큰 소리로 짖어댄다. 하지만 사람 그림자 하나 만나지 못했다.

다시 소호정으로 내려와 정내에 걸린 현판과 편액을 보고 있는데 마침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간다. 정자 마루에서 서성대는 나그네를 보고 할머니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신다. 옳다 이때다 싶어 신분을 밝히고 이 마을 사정에 밝은 어른이 마을에 계신지 여쭈어 보았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서 직접 집까지 안내를 해주셨다. 당주의 성함은 서용식(73)씨이고, 소호정을 지은 소호 서희서의 13세손이라 하셨다. 집안으로 들어가 평절로 인사를 나누고 마을 내력에 대해서 한참 동안 설명을 들었다.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집에 보관하고 있는 중요한 책자도 한권 빌려주셨다. 이 책 안에는 서희서가 쓴 원래의 소호정기를 비롯하여 필자가 꼭 알고 싶었던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서씨에 따르면 신풍마을의 입향조는 서홍필(1457~1560)로, 서희서의 부친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소호정은 영암의 3대 정자 중 하나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여기저기에 우후죽순 격으로 정자가 생겨났는데 ‘소호정이 그것들과 격이 다른데 동급으로 취급되기 싫다’는 이유로 영암군에 정자 등록을 거부하는 등 관리를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

신풍마을 소호정 주인 소호(蘇湖) 서희서

1555년생으로 본관은 이천, 자는 경추(景推)이고, 호는 소호(蘇湖), 어은(漁隱)이다. 정유재란 때 현감 전몽성, 첨사 유장춘, 유학 김덕흡 등과 함께 죽음을 맹세하고 유점재에 가서 지켰다. 많은 적들이 쳐들어와 여러 차례 싸워서 수백 명의 왜적을 무찌르니 이후로는 영암의 남쪽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생명을 지킬 수가 있었다. 이러던 차에 서희서는 부모가 병환에 계셔서 싸움터에서 떠나 잠시 집에 있었다. 그때에 왜적들이 은적산 뒤에서 갑자기 쳐들어오면서 공격하니 총알이 비오듯 날아오고 적들은 수가 많았고 아군은 수가 너무나 적었다. 전몽성, 유장춘, 김덕흡 등이 한꺼번에 순절하였다.

서희서가 부모님께 약을 다려 드린 뒤에 싸움터에 달려와 보니 세 장수가 이미 순절하고 아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어 가슴이 미어지는 설움에 복받쳐 시체를 껴안고 목 놓아 울면서 “그대들은 나라를 위해 순절했는데 나만 죽지 않고 살아 남아서야 되겠는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다가 번뜩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어 “나라에 몸을 바치지 못한 것은 늙고 병든 부모가 계시기 때문이었으니 충성과 효도를 함께 이루지 못함은 권유에 못 이겨 집에 갔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을 기회를 얻는다면 어찌 충효를 함께 이룰 수 없겠는가?”하고 집으로 돌아가 약을 달여 부모를 모셨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그 예를 다하였다.

그 후로 학문과 행동이 남과 달라 그 내용이 조정에 알려져서 1610년에 제원도찰방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질 않았다. 강물 근처에 정자를 세워 소호라 부르고 중형인 국제 서희신과 함께 쉬며 월사 이정귀, 상촌 신흠, 동악 이안눌, 김겸제, 신명규 등과 시를 읊으며 자연에서 노닐었다.<이재현이 쓴 소호서공행장 참조>

서희서(徐希恕)가 쓴 소호정기

소호주인 서희서가 쓴 소호정기 원문.

호남의 서남쪽 노령산맥 밑에 있는 모든 고을 중에서 월출산이 가장 좋으니 옛 명칭은 월생산(月生山)이라 하였다. 천왕봉, 구정봉, 일곱 개의 폭포(칠지 七池)가 있으며 하늘에 떠 있는 별들처럼 수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골짜기들이 함께 있어 작은 금강산이라고 한다.

월출산 자락이 서쪽으로 뻗어 내리다 솟아 오른 봉우리가 가학봉이 되었으며 자잘한 산줄기가 강과 들을 건너 용강(龍江)을 만나 떡 버티고 있는 봉우리가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관봉(冠峰:은적산)이라 부른다. 은적산에서 흘러내린 작은 산줄기들은 잘록한 개미허리와 날씬한 학의 다리 같고, 난(鸞)새가 춤추듯이 연이어지며 그 사이마다에는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 내리고 멀리 동쪽의 월출산과 마주 대하고 있어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후손이 자기의 조상을 돌이켜 보는 형국”이라고들 말한다. 호수의 가운데에 크고 작은 섬들이 있으니 중국에 있는 소주(蘇州)와 항주의 고을처럼 경치가 비슷하여 학자들이 서호(西湖)라 불러오며 작은 섬들은 고산(孤山)이라 하고 호수의 북쪽에 있는 물가를 소호(蘇湖)라 부르게 되었다. 1589년에 아버지를 소호의 남쪽에 묻고 형은 묘의 앞을, 나는 묘의 뒤를 지키면서 산불이 일어나자 않도록 하고 정자를 건립하여 부모를 그리워하였다.

1597년 이후에 불에 타 없어진 건물터에 다시금 정자를 지어 주변의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좋은 나무를 심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산의 사이에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옛날의 환상에 젖어들었다. 정자의 주위는 온통 물이며 그 물들은 산에서 흘러나오고 멀리로는 담양의 추월산, 광주의 무등산, 나주의 금성산이 우뚝 솟아 있고 아홉 고을의 물들이 용강으로 모여든다. 동과 북은 아스라하여 해오라기가 나는 것이 언뜻 눈에 띄질 않고 서와 남은 포구이며 하늘과 물의 색깔이 같아 보이고 고기 잡는 마을이 열 몇 군데 있어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겸하여 천태만상의 산 경치와 봄가을로 변화하는 모습들이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러나 경치가 좋다한들 “사람다운 사람이 살아야 더 유명해지고, 정자는 거기에 걸려있는 시구 때문에 유명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호는 하나의 강물 줄기로되 화정(和靖)선생이 매화를 심은 데서 유명해지고, 악양(岳陽)은 성(城) 위의 누각인데 희문(希文)이 그 내력을 글로 엮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 등왕각(滕王閣)에 낙하(落霞)의 글귀가 없었고, 적벽(赤壁)에 소동파의 글이 없었다면 땅이나 사람이 어찌 유명해질 수 있었겠는가?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정자를 지어 그에 알맞은 시구를 찾아보니 “이곳에 그대의 말이 없으면 안되겠다(比間不可無君語)”라는 구절이 있어 그대들에게 남기노니 보고 듣는 이는 깨달음이 있으리라. 1612년 소호정 주인 서희서 쓰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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