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산 마실길-신풍(新豊)마을(1)
중국 소주와 항주의 서호(西湖)를 본떠 붙여진 ‘서호’
원래 이름은 산골정(産骨亭)
영풍리에서 신풍마을로 가려면 나지막한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주민들은 이곳을 모개나무재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고개 꼭대기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은적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관봉을 가기 위해 많이 이용하는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모개나무재는 필자가 어렸을 때 형과 함께 리어카를 끌고 칡을 캐러 다녔던 추억이 깃든 길이기도 하다. 군서 모정마을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가려면 두 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래도 칡을 캐기 위해 삽, 괭이, 톱 등을 리어커에 싣고 자주 다녔었다. 그 당시에는 자갈이 깔린 신작로였지만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이 잘 되어 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산골정(産骨亭)이라고 새겨진 입석을 만나게 된다.
산골정은 마을 뒷산에서 천연상태의 황화철인 산골이 나오는 마을이다. ‘산골은 민간에서 뼈를 붙이는 약으로 사용하는 자연동이다’라고 허준은 동의보감에 기록했다. 과거에는 뼈가 부러질 경우 산골을 갈아먹으면 뼈가 잘 붙는다 하여 사람들이 구하러 오곤 했다고 한다. 현재 신풍마을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행정개편을 할 때 생긴 이름이다.
이천서씨(利川徐氏) 집성촌
이 마을에는 소호정이라는 이름의 멋진 정자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선조~광해군대의 사람인 이천서씨(利川徐氏) 찰방 서희서(察訪 徐希恕)가 1612년 창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호남인물지(湖南人物誌) 영암(靈巖)편을 보면 “서희서의 자(字)는 경추(景推), 호(號)는 어은(漁隱), 본관은 이천(利川), 판윤(判尹) 숙명(淑明)의 증손, 첨추(僉樞) 홍필(弘弼)의 아들이다. 선조 18년에 사마(司馬)하여 아들 건(鍵), 전몽성(全夢星)과 함께 의병(義兵)을 거느리고 율치(栗峙), 월출산(月出山)의 유점(유店)에서 전공(戰功)을 세웠기에 찰방(察訪)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풍마을에 고인돌이 3기나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당시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찰방 서희서가 이곳에 은거하면서부터 그의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서희서가 세운 정자 소호정은 주변의 빼어난 풍광 덕택에 시인묵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호남의 명소였다. 소호정기는 영정조시대 호남 최고의 실학자 장흥의 존재 위백규 선생이 썼다.
위백규의 소호정기(蘇湖亭記)
낭주(朗州 영암)의 서호(西湖)는 월출산(月出山)과 나란히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지역 내 명소이다. 옛사람들이 그곳을 ‘서호’라고 부른 까닭은 중국 소주(蘇州)와 항주(杭州)의 서호를 본떠 그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니 뛰어난 풍경을 알 만하다. 대개 월출산과 흑석산(黑石山) 두 큰 산의 여러 골짜기 물이 큰물을 이뤄 서쪽으로 내달려 바닷물을 만나 웅덩이가 호수를 이루었으니, 평평한 물결은 마치 하얀 비단을 펼친 듯하다. 둘레가 또 100리인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만 겹의 안개와 꽃들이 호수 가운데에서 빛난다. 멀리 금성(錦城 나주)과 서석산(瑞石山)의 빼어난 경관까지 보이니, 항주의 서호가 과연 이처럼 빼어난 경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 연꽃과 계수나무가 없다고 하여 소홀히 봐서야 되겠는가.고(故) 생원(生員) 서공(徐公)은 가장 빼어난 터를 골라 정자를 짓고 그의 형 부사공(府使公)과 함께 시를 읊조리고 물고기를 잡으며 노년을 즐겼다.
당시 저명했던 분들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동악(東嶽) 이안눌(李安訥)이 모두 이곳의 경치를 시로 읊어 찬미하였다. 무릇 천지간에 좋아할 만한 것은 물인데 어느 곳인들 물이 없겠는가마는, 물은 절로 뛰어난 풍경이 되지 못하고 사람을 만나야만 뛰어난 풍경이 된다.항주의 서호는 임화정(林和靖)때문이요, 구주(衢州)의 동강(桐江)은 엄자릉(嚴子陵)때문이며, 주(周)나라의 반계(磻溪)는 강자아(姜子牙)때문이다. 그 나머지 굽은 시내, 작은 냇물조차 큰 인물인가 작은 인물인가에 따라 명성이 더불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는데 거의 천백을 헤아릴 만큼 많다.
그런데 유독 서호는 임안(臨安)이라는 황제의 도성 옆에 자리해 명망 있는 선비들에게 경치가 뛰어난 곳이라고 칭송받았다. 또 매화주인(梅花主人)의 차지가 되어 인물이 호수와 더불어 고금 천하에 하나가 되었다. 만일 이 영암 서호를 항주 서호에 가져다 놓는다면 땅이 바뀌면 다 그렇게 된다는 정도에 그칠 뿐이겠는가.이곳이 호수가 된 것은 아마 4만 년 정도 되었을 터인데,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어찌 서호의 아름다움이 저 항주의 서호만 못해서이겠는가. 서공이 차지하고 그 정자에 이름을 붙일 적에 마침내 ‘소호’라고 이름 짓고, 스스로 ‘소호주인’이라고 호를 지었다. 이때부터 나라 안에 서호라는 이름이 알려져 소주의 호수와 서로 견주곤 하였다.
고문(古文)에서 서호를 본 사람은, 이곳에 이르러야 진정 서호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서공의 정자에 오르면 여기서 주인의 풍모를 만날 수 있으니, 이 호수가 과연 소주의 호수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호수가 과연 소주의 호수인지, 아니면 이 호수를 소주의 호수처럼 여겨서 소호라고 이름 붙인 사람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정자가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져 황량한 누대에 무성한 풀로 덮여 있지만 지나는 사람이 끝내 그 호수를 보지 않고도 주인에 대해 일컫고 있으니, 호수의 뛰어난 풍경이란 물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주인의 5대손 서호원(徐祜遠)이 다시 정자를 새롭게 세워, 호수의 뛰어난 풍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서호원은 과연 조상을 본받은 후손이며 뛰어난 풍경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정자가 훼손되지 않으면 서공이 사라지지 않을 터이고, 서호원이 늘 있어 소호는 항상 뛰어난 풍경이 되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드디어 정자 기둥에 글을 써 훗날 이 정자에 오르는 이들이 서호를 감상하는 데 낯선 손님이 되지 않기 바란다. 영조 34년(1758) 존재 위백규 쓰다.<존재집 2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