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대동계지’ 발행 이어 ‘맥잇기’ 계속

은곡 대동계 계원들이 성금을 모아 지난해 300년 연혁을 담은 은곡 대동계지를 발행한데 이어 최근에 집영재 경내에 기실비’(記實碑)를 건립해 선인들의 위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은곡 대동계는 1734년 마을의 미풍양속을 지키기 위해 동계를 조직한 학산면 은곡동계(隱谷洞契)가 그 시초로, 283년이 흐른 지금까지 64명의 계원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다음은 은곡 대동계 오인영 공유사의 가마굴 마을과 은곡대동계에 관한 글 내용이다.  

가마굴 마을과 은곡대동계(隱谷大洞契)  

가마굴을 은곡 마을이라 한다가마굴은 태초부터 가마굴이었고 지금도 가마굴이다그 어원은 옛날 한 여름에 말 탄 나그네가 마을을 지나다가 말이 갈증을 느껴 물을 먹이려고 샘을 찾았으나 물이 없어 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하여 갈마곡(渴馬谷)이라 한 것이 변음되어 가마굴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가마굴의 개촌(開村시기는 서기 1600년경으로 추정된다맹산현감을 지낸 밀양김씨 김성발(金聲發)공이 무주공산이던 가마굴에 입향(식수따라 성적골(聖積洞)에 터를 잡았다개촌당시는 바닷물이 동리 앞까지 들어왔으며 식수가 오직 성적골 샘 뿐이었다김성발공이 터를 잡으니 혼척(婚戚)으로 엮어진 제주양씨순천김씨옥천육씨선산임씨해주오씨의 사대부족들이 노복들을 거느리고 속속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서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하면서 유유자적하는 행위가 성인들과 같다하여 개촌지를 성적골이라 하였다.

성적골은 현 가마굴 동리에서 북동쪽으로 1㎞ 상거(相距)의 깊은 산골이다성적골에 개촌하여 누대가 지나고 세대가 늘어남에 따라 성적골은 지협(地峽)하여 자연스럽게 현재의 위치로 하촌(下村개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양지말아랬물샛터 마을이 생기고 남쪽에 음지말웃골안산마을이 형성되어 여섯 개 마을을 한 취락으로 가마굴이라 하였다.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가마굴과 이구산 석포마을을 합하여 은곡리(영암군 학산면 은곡리)라 하였다그러나 통상 은곡리 하면 가마굴을 지칭하며 은곡리는 가마굴 마을의 대명사이다.

한때는 가옥수가 120여호에 달했으나 70년대 이후 산업사회가 되면서 인정들이 마을을 떠나 지금은 음지말과 양지말에 겨우 20여호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폐교된 학산서교(鶴山西校)와 집영재(集英齋), 아산사(雅山祠)가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가마굴에 대동계가 창계(創契)된 것은 1734년이다이때의 마을 형편은 수년간 흉년들어 굶주려 죽어가도 구하지 못하고 인륜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세속은 말세에 이르렀다이에 양지하(梁之廈)공은 마을의 미풍양속을 다시 찾고자 밀양김씨순천김씨옥천육씨선산임씨해주오씨의 6성씨 원로들과 의논하여 자치향약의 4대강목(德業相勸過失相規禮俗相交患難相恤)에 따라 대동계(大洞契)를 창립하였다자치규범으로 본문(本文) 22조와 추약(追約) 7조의 엄한 규율을 계헌(契憲)으로 정하고 본곡 3두씩을 추렴하여 이자 길러 춘추로 강신하면서 환난시는 구휼하고 애경시는 상조하며 노약자는 공경하고 풍속 문란자는 손도(損徒)로 다스리니 풍속은 순해지고 고례지풍은 되살아나 온 마을이 화목하고 협동하게 되니 선인들은 이 의로움을 옛 중국의 난정회와 여씨향약에 비유하였다.

대동계의 계사(契舍)인 집영재(集英齋)는 1815년에 건립되었다건축양식이 초익공팔자형(初翼工八字型)으로 독특하여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집영재는 다목적으로 이용되었는 바 후진교육을 위한 학당(서당)을 개설학문을 강론하였고 마을민의 지예와 정담을 나누는 휴식처요공론을 정하는 공회당이기도 하였다암울했던 일제시대에는 지역민의 문맹퇴치와 극일(克日계몽의 야학당이 되었고 민초들의 은밀한 항일의 장이기도 하였다. 1944년 학산서교가 여기에서 개교신학문의 산실이 되었고 신년 원단에는 마을민의 합동 세배소이기도 하였다

창계이래 계원의 연 인원은 400여명에 이르고 출사(出仕:벼슬)한 자는 문과(文科출신으로 정조 때 이조좌랑을 지내시고 노동사에 배향된 김종경(金宗瓊)공과 고종 때 공조참판을 지내시고 아산사에 배향된 오경이(吳慶履)무과(武科출신으로 정조 때 선전관을 지내신 김응현(金應鉉)공이 있다.

현재 계원수는 64명이나 가마굴에 거주한 계원은 공유사를 포함하여 고작 2명 뿐이다이 두 계원마저 마을을 떠난다면 앞으로 은곡 대동계는 수호절벽(守護絶壁)으로 선인들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인몰될지도 모른다이를 대비하여 은곡 대동계에서는 계원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대동계 300년 연혁을 담은 대동계지를 발행하고 겸하여 집영재 경내에 기실비(記實碑)를 세웠다은곡 대동계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기실비와 함께 영원하기를 염원한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