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1

<사진설명>영풍마을의 따사로운 겨울풍경. 마을은 평화스럽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영풍마을 역시 아이들 뛰어 노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수록 쇠락해가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에 뛰어 노는 아이들이 없다

 

영풍마을을 떠나며

영풍마을은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은적산이 북서풍을 막아준 탓인지 따뜻하고 아늑하다. 겨울 안개가 적당히 산허리를 감싸고 있어서 수묵화에 나오는 마을처럼 신비스럽기도 하다. 마을은 평화스럽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영풍마을 역시 아이들 뛰어 노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골목마다 빈집이 늘어나고 있지만 객지로 나간 자손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좋은 마을들이 갈수록 쇠락해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이제 영풍마을을 떠나 신풍마을로 발걸음을 재촉할 시간이다. 신풍마을로 떠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이전에 읽었던 오래된 미래’<저자: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라는 책을 다시 꺼내어 읽어 보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것들을 다시 느끼고 잊고 있던 옛 추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려 본 기억이 있다. 은적산 마실길을 나선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 중간 점검을 하면서 문득 이 책의 내용을 영암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정점에 이른 이 시점에서 디지털 정보화시대를 지나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적인 삶의 방식과 자연친화적인 농경문화 속에서 우리가 배울 것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

티벳 고원의 농경과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작은 나라 라다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약 40년 전까지의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작은 규모의 촌락들이 기본 단위를 이루는 농경사회, 협동과 상부상조의 정신, 자율적으로 작동되는 마을의 규칙들, 마을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공동체 의식 등 닮은 점이 많다.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산업화와 도시화 이후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 또한 놀라울 정도로 우리나라의 사정과 비슷하다.

농사와 농촌마을은 무시되고, 수 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문화는 천시 받거나 소멸되고 있으며, 서구문화에 대한 무분별한 동경과 집착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 집중화는 국토의 극심한 불균형과 난개발을 초래했다.

라다크도 서구 산업문화의 유입으로 이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책은 한 서구인이 바라본 시각에서 라다크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우려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씌어졌다. 이 책을 통하여 라다크의 전통과 현재 처해있는 현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책의 저자가 책머리에 쓴 프롤로그 내용을 본문 그대로 소개하면서 시작하기로 한다.

 

서구 산업문화의 침략과 일반화 경향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무지와 질병과 끊임없는 노역이 산업화 이전 사회의 운명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에서 우리가 보는 빈곤과 질병과 굶주림은 얼른 보아 그러한 가정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오늘날 제3세계의 문제들은 그 대부분은 아닐지 몰라도 많은 경우에 식민주의와 오도된 개발의 결과이다.

 

갈수록 서구문화는 정상적인 것, 유일한 방식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이고 탐욕스럽고 자기 중심적으로 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성향들은 인간본성 탓으로 돌려진다. 서구사회의 지배적 사고는 오랫동안 우리가 본래 공격적이고, 다원주의적 투쟁에 영원히 갇혀있다고 가정해왔다.

산업 단일문화의 확산은 다차원적인 비극이다. 한 문화가 파괴될 때마다 수세기 동안 누적된 지식이 말살되고, 다양한 인종집단이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낌에 따라 거의 불가피하게 갈등과 사회 붕괴가 뒤따른다.

서구문화는 보다 넓고 장기적인 관점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전문화되고 당장 눈앞의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경제는 갈수록 커지는 전문화와 중앙 집중화 그리고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 생활양식으로 세계를 빠르게 끌고 가고 있다. 이전에는 우리가 오늘날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속도로 기후에 영향을 미치고 바다를 오염시키거나 숲과 생물종과 문화를 말살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우리의 파괴력의 규모와 속도가 이렇게 컸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대규모 환경파괴, 인플레이션, 실업 등은 정치적 좌우익과는 별 상관없는 기술공학적 역학의 결과이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한 종류의 과학과 기술에 기초한 한 가지 개발 모델만을 경험해왔다. 그에 따른 전문화와 중앙 집중화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차이를 능가하는 극적인 삶의 변화를 초래했다.

 

나는 라다크에서 낭비도 오염도 없는 사회, 범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는 건강하고 튼튼하며, 십대 소년이 자연스럽게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유순하고 다정스럽게 대하는 사회를 알게 되었다. 그 사회가 산업화와 현대화의 압력 밑에서 붕괴되기 시작하는 지금 그러한 교훈은 라다크에만 국한되지 않는 의미를 가진다.

라다크에서 나는 산업화(현대화)로 인하여 사람이 땅에서, 서로 서로에게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보았다. 원래 행복했던 사람들이 서구적 규범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평온함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 결과 나는 문화가 개인을 형성하는데 내가 일찍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긴급히 지속가능한 균형(도시와 농촌, 남성과 여성, 문화와 자연 사이의 균형)을 향해 방향을 돌려야 한다. 라다크는 우리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상호 관련된 힘들을 우리가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의 나아갈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러한 보다 넓은 시각은 우리 자신과 지구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는다.󰡓<프롤로그>

 

라다크의 전통

티베트 고원의 농경 목축사회이며, 종교는 대승불교, 달라이 라마가 정신적 지도자이다. 티베트 공동체마을의 가구당 평균 경작지는 약 5에이커인데 집안의 노동인구 1인당 약 1에이커에 해당한다. 경작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난 농경지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2월에서 6월 사이가 농사주기이며 8개월의 혹한기가 있다. 라다크인들의 생활 특징은 추수와 축제행사, 검약과 가내수공업, 차와 술 담그기, 옷 만들어 입기, 퇴비 생산하기, 빈약한 자원의 재순환 등으로 묘사될 수 있다.

 

라다크 마을공동체 안에는 의사와 샤만(점성가)이 있으며 이들이 치료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맡는다. 라다크는 철저하게 함께 사는 사회이며 협동과 상부상조가 그 기본 정신이다. 농경사회에 걸맞게 우리 대한민국의 전통 농촌마을의 특징과 여러 면에서 닮은 꼴이다. 예를 들면, 고바(이장), 파스푼(넷에서 열두 가구로 이루어진 협동 조직)(두레, 품앗이), 추쪼(소집단의 농사 노동), 베스(공동작업 - 울력), 라레스(공동 짐승 돌보기), 일과 노래와 춤(노동요, 풍물, 집단 놀이) 등이다.

라다크에서는 개인의 이익이 전체 공동체의 이익과 상충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이익이 다른 사람의 손해가 되지 않는다. 남을 돕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한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걷는 것이 다른 농부에게 흉작을 초래하지 않는다.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이곳의 경제를 이루고 있다. 즉 공생의 사회이다.

 

대가족 제도

라다크는 다양한 형태의 혼인제도를 갖고 있다. 라다크의 여성들은 늘 존중받고 있으며 가정 내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전통 육아는 대가족 내에서 이루어지는데 아이와 끊임없는 접촉을 통하여 정서적인 유대감과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른 나이부터 역할을 부여하여 책임의식을 갖게 한다. 전통적인 생활방식은 아기와 엄마가 늘 함께 있을 수 있게 한다.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온 마을이 축하잔치에 참여한다. 아이는 한 공동체 속으로 태어난 것이다. 아이들은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서 무제한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다. 누구라도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아이들은 제 또래의 집단으로 분리되는 일이 없고 어린 아기에서 조부모까지 모든 나이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란다. 아이들은 주고받는 관계의 사슬 전체 속의 한 부분으로서 자란다.

 

늙은 사람은 생활의 모든 분야에 참여한다. 라다크의 늙은 사람들은 쓸모없이 혼자서 허공을 바라보며 지내는 세월은 없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조부모들은 기운이 세지는 않지만 다른 자질로 기여할 수 있다. 늙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기있고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있는 주된 이유는 젊은 사람들과의 계속적인 접촉이다. 조부모와 아이들과의 관계는 아이들과 부모와의 관계와 다르다. 가장 늙은 사람과 가장 젊은 사람은 특별한 결속을 이룬다. 그들은 흔히 제일 친한 친구이다.

아이들은 다치거나 야단을 맞으면 할머니에게 위안을 받으러 달려가게 마련이다. 할머니는 아이가 모두 잊어버릴 때까지 안고 흔들어주거나 같이 놀아준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고대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말하자면 소도나 다름없다. 부모의 사랑과 조부모의 사랑은 그 특질이 다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라.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볼 수 있으나, 손자손녀를 버리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는가?

 

라다크인들이 신봉해온 전통 종교는 불교이다. 라다크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실재 개념은 순환, 즉 끊임없는 회귀이다. 이번의 삶이 유일한 기회라는 느낌은 없다. 죽음은 끝인 만큼 시작이기도 하다. 죽음은 하나의 태어남으로 가는 과정이며, 최종적인 해체가 아니다.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명상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깊은 명상은 승원 밖에서는 별로 행해지지 않지만 사람들은 상당한 시간을 준명상적 상태에서 보낸다. 일하면서 걸으면서 진언을 외우기도 한다.<계속>

 

/사진 김창오 시민 기자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