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서 ·학산면 매월리 ·전 한국일보 기자 ·5·18광주민중항쟁 관련 강제해직 ·전 무등일보 발행인·대표이사

 

내 고향은 학산면 매월리다마을 주변이 온통 산으로 삥 둘러싸여 있어서 영산강 하류인 마을 앞 해변만 막아버린다면 영락없는 산속 동네다어렸을 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영암환을 타고 목포로 가는 게 가장 편리했지만 마을 앞 나룻배(從船)가 고장이라도 나는 경우 하는 수 없이 인근 주룡이나 태백리까지 걸어가야 했다바람이라도 불어 영암환이 다니지 못하면 그나마도 어려워 가능굴 재’ 를 넘어 시오리 길을 걸어 나가 용당리 가는 자동차를 타야 했다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자취하는 식량과 반찬땔감을 가지고 가야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로 영암환을 이용했다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추운 겨울 어느 날영암환을 타기위해 태백리를 가면서 머슴은 식량과 장작을 지게에 지고 나는 김치오가리와 책 보따리를 들고 가다가 태백리 앞 바윗길에서 눈길에 넘어져 오가리가 깨지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와야만 했었던 잊혀 지지 않는 아픈(?) 추억이 있다

모두가 어렵게 살았던 1950년대 -. 그 시절의 추억이긴 하지만 그 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한 게 하나 있었다그것은 우리 고향 마을에 버스를 다니게 하는 것이었다자동차는커녕 리어카도 다닐 수가 없는 좁은 도로 -. 짐을 옮기는 수단이래야 지게가 고작이었던 해변 산중-. 그 매월리가 반촌(班村)이어서 어떻고몇 대 선조께서 무슨 벼슬을 하셨고” 레코드판 돌리듯 방학이면 족보를 꺼내 놓고 가르치시던 아버지와 백부님-. 그게 싫어서 한번은 아버지보다는 이무런 큰아버지에게 따지고(?) 들었다. “도대체 이 산굴 청에 살면서 양반이 뭐 그리?” 했더니 도시에 학교 보내 놨더니 자식 배랬다.”며 한탄하셨다

세월이 흐르면서 고향 매월리도 길이 열렸다. ‘가능굴 재’ 가 아닌 해변가 쪽으로 길이 났다는 것이다갓 낸 도로여서 터덜거리긴 하지만 차가 다닐 수는 있다고 했다나는 전남도를 찾아가 버스를 넣어달라고 애원했다. “된다안 된다.” 를 반복하다가 버스를 넣기로 결정이 났다첫 버스가 운행하던 날 나는 광주 터미널에서 광주매월리’ 라는 운행 표지판을 달고 출발하는 것을 보고 기뻐서 울컥 눈물이 솟았다그리고 얼마를 지났을까고향에서 연락이 왔다버스가 종점을 이웃마을로 옮기려 한다는 것이다내가 사는 마을은 매월리 1구인데 행정구역상 2구인 미교리로 넘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다시 전남도 담당자에게 쫓아갔다확인을 했더니 내무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광주에서 매월리를 운행한다면 2구로 가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며 이해하라” 했다나는 당초 말했던 매월리(1)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떼(?)를 썼다그것은 추운 겨울 어느 날의 깨진 김치오가리의 한 때문이었으리라전남도는 하는 수 없이 버스회사와 상의해서 양쪽을 번갈아 다니는 것으로 조정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른 어느 날광주시청 기자실에 영암 사람’ 둘이 앉아 신나는 얘기꽃을 피웠다전석홍 시장님과 내가 50년대 그 어려웠을 때의 학교 다닐 적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목포고등학교 선배이셨던 전 시장님과 나의 고향은 그리 멀지 않아 목포까지의 교통수단이 엇비슷했다. “그 땐 말이야-. 지나가는 트럭이 손을 들어 세워주면 트럭 뒤라도 올라타 그 많은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얼마나 좋던지 말이야그 트럭이 용당리까지라도 간다면 이건 복권이라도 당첨된 기분이었제.” 

다음엔 내가 학교 다닐 적의 얘기를 꺼냈고 그래서 그 불편함 때문에 매월리에 버스를 넣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자 전 시장님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그 때 매월리에 버스 넣은 사람이 박희서야내가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으로 있을 땐데 미교리 새마을지도자가 와서 어느 신문기자가 매월리에 버스를 넣는다는데 매월리로 가는 버스는 미교리가 종점이 돼야 한다며 자기 마을로 종점을 해달라는 거야당시 새마을지도자의 청원은 일단 관리해야 하기때문에 전남도에 잘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었지.” 

세상 참 좁다면서 일어선 전석홍 선배님은 우리가 말이야영암을 위하는 일이라면 넓은 시각으로 봐야 돼-.” 이는 고향에 버스가 다니면 됐지 1·2구를 따지는 것은 속 좁은 생각 아니냐?”는 핀잔이었지만 그 때 난 내 맘의 한을 생각해보고 하시는 말씀이냐?”고 되묻고 싶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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