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마을 3

<사진설명>관봉사 조정비

영풍마을 돌담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면 마을 한 복판에 함평노씨 문중사우 관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관봉사 앞에는 조정비가 세워져 있고 뒤쪽으로는 술유재가 있다.

 

동양의 해동부자금계(錦溪) 노인(魯認) 중국에서도 극찬 

문무를 겸비한 지조 높은 선비

임진왜란 때 의병 모아 맹활약

 

명나라서 뛰어난 문인으로 활약

관봉사(冠峯祠)에 봉안된 다섯 분의 행장 중에서 필자의 눈길을 가장 강하게 끈 것은 금계 노인이다. 문인 출신이면서도 임진왜란 때 칼을 잡고 전쟁터에 나가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의병장이다. 권율 장군과 함께 여러 전쟁터를 누비며 전공을 세우던 중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가 명나라 사신들을 따라 탈출에 성공했다. 명나라에서 문인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동양의 해동부자라는 칭송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순신, 권율, 김천일, 고경명 등의 이름은 익히 들었어도 금계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 영풍마을에 와서 처음 들었다. 우리가 공부한 역사가 고작 이 정도이다. 그가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집필했던 금계일기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과 중국의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 함평노씨 대종회의 도움을 얻어 금계공 노인의 행장을 소개한다.

*해동부자(海東夫子:중국인들이 발해의 동쪽 나라인 한국에서 덕행이 높아 만인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일컫는 말)

 

금계(錦溪) 노인(魯認)(1566~1622)

초명(初名)은 인()이고 호()는 금계(錦溪), 본관은 함평이다(함평노씨 16세손). 선생은 나주 거평면 하의촌(河衣村, 현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명하마을)에서 1566년에 부친 사증(師曾, 증이조참의)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 곁에 앉아 어른들이 하서 김인후 선생의 덕행을 칭송하며 경애하는 말을 듣다가 감격해서 시를 한 수 지었다.

 

明月照 積雪 光輝 盈我窓(눈 속에 밝은 달빛 내 창을 비치누나)

與誰同批勝(맑은 이 경개를 누구와 함께 볼고)      

金子世無雙(세상에 스승 같은 이 또 계신다 하오리오)   

 

이후 소년시절에 율곡을 찾아가 가례(家禮. 집안의 예절)의 의의를 물어 큰 칭찬을 받았고 일찍부터 국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병서를 섭렵하고 방어책을 연구하는 등 무예를 닦았다고 한다.

10세 전후에 경사에 능통했고 17세에 문과(진사과)에 급제했다. 시문이 뛰어나고 주자학에 능통하여 당시 뛰어난 문인이었던 지봉 이수광, 한음 이덕형, 수운 강항 등과 교류하였다. 27세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인 권율 장군의 부름을 받고 의병을 모아 무인의 길로 들어섰다. 붓을 내려놓고 무인의 길로 들어가면서 그는 비장한 심정으로 시 한 수를 남겼다.

 

장부가 이런 세상을 만났으니

월나라 왕의 부끄러움을 생각하노라

창과 방패가 우주 가득하니

문학과 역사공부는 잠시 그만둬야 되겠네.

 

무인이 된 금계 노인은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권율 장군과 함께 전라도 이치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진산(珍山)과 서울 근방의 행주에서 크게 이겨 명성을 떨쳤다. 명과 왜 사이의 지루한 화의교섭이 결렬되자 1957년 정월에 풍신수길은 15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이순신 장군이 실각된 사이 원균은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호남은 위기에 빠졌다. 왜군들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고 1597815일에 남원성 전투가 벌어졌다. 5,000여명의 조명 연합군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10배가 넘는 왜군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결국 남원성은 함락되었고 금계 선생도 총을 맞고 쓰러져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남원에서 포로가 된 그는 전라좌수영 방답진으로 이송되었다가 여수 돌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그는 왜군에게 물었다. “왜 나를 죽이지 않고 데려가는 것이냐?”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대는 젊고 글을 잘 아니 일본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금계는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왜승 희안(希安)이 그 충렬에 감복하여 고기반찬을 제공하였으나 아버지와 임금의 생사를 몰라 죄인으로 자처 어육을 먹지 않고 백의를 입고 밥을 대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희안이 감탄해 말했다 "법도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희안은 금계가 요구하는 일본의 풍토기와 지도 등을 제공하는 등 갖은 친절을 베풀었다금계는 일본 산천의 험함과 허실을 기록, 고국에 보내 정보를 제공하고 귀국을 도모하였다. 포로생활 2년 만에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기다렸다.

 

포로의 몸, 중국에 가다

1599년 명나라 간척사 임진혁과 부하 이원형의 도움으로 2차 탈출을 기도하게 된다. 임진혁은 명나라가 간첩으로 보낸 사신이었다. 금계가 임진혁을 만난 것은 그해 봄이었는데 이원형은 금계를 임진혁에게 이렇게 소개하였다 "조선의 정3품 관리로 정유년 난리에 형제와 처자 골육이 다 적의 칼에 맞아 죽고 그만 홀로 목숨을 보전하였으나 포로로 이 땅에 들어와 돌아가지 못하고 밤낮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불쌍하다. 사람됨이 시문에 능하고 서화에도 뛰어나 의기가 번뜩인다. 그가 몹시 바라는 것은 우리들과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탐지한 왜놈들의 사정을 명나라에 고하고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있는 자들을 소환한 뒤에 뒷날 복수할 계획을 만드는 것"이라 하니 임진혁이 답했다. "그대의 기상을 보니 과연 오랑캐 지방에 장사 지낼 인물이 아닙니다. 장차 우리들과 배를 같이 타고 바다를 건너가면 복건성 군영에서 마부와 말을 내어 북경으로 호송하여 주겠습니다."

 

금계는 바로 다음 날 일본을 탈출하여 중국행 배에 동승하게 되었고, 명나라 복건성 항구인 ""에 도착하였다.

항구 장관이 물었다 "왜 곧바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수만리 타국으로 왔느냐?"  "우리나라는 비록 뱁새나 초목이라도 모두 왜놈들이 피해를 입혔다. 더구나 나는 정유년 가을에 부모, 형제, 처자를 잃고 나만 살았다. 한때 같이 죽지 못하고 포로로 들어가 그들의 정세를 탐지하건데 풍신수길은 죽었어도 남은 도적은 분해하고 부끄러워하며 잔악한 마음을 고치지 못하였다. 어쩔 수 없이 후회하는 것을 보고 깨끗이 숙청했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명나라 조정에 아뢰어 조선을 회복하고 일본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다"

 

금계의 애국심에 감복한 중국 사대부들은 흰옷과 갓을 만들어 주었다중국에 머무는 동안 금계는 중국 황제에게 소를 올렸고 시문의 재주를 인정받아 주회암 서원에 들어가 중국 학자들과 강목, 춘추시서를 토론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여러 학자들이 탄복해 석별지에 "노선생은 동양의 해동부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여러 현사들과 노래를 지어 나누어 문집을 만들었는데 책 이름은 <황명유운皇明遺韻>이다.

 

황해도 수군절도사 지내

1599년 명나라 신종황제에게 소를 올려 귀국을 하소연하니 달마 한 필을 내려 주었다. 금계는 오, , , , 위를 거쳐 노나라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공자묘와 주공묘를 참배하고 여러 군자들과 경학의 어렵고 의심난 점을 문답하며 시원스럽게 답하니 칭찬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이어 연경 요동을 거쳐 이듬해 선조 34년 정월에 서울에 당도하니 그 사이 35개월이란 세월이 지났다. 한양에 돌아와선 쉴 사이도 없이 선조에게 수계책을 올려 일본을 영원히 물리칠 전략을 제시하였다. 역마를 타고 나주에 내려와서 부모의 묘에 엎드려 추복하였다복을 벗고서 3년 후에야 권무과에 들어 선전관이 되었다. 이듬해 통제사 이경준과 당포로 가 일본의 잔병을 격파하자 선조는 직접 승전도를 내려 주었다. "금계가 전함을 수리하고 사졸을 구원하여 기이한 시책으로 매양 복수에 힘쓰니 사직신과 다를 바가 없다" 선조는 그의 전과를 높이 사고 수원과 옹진 두진()의 책임을 맡겼다

31세 정유재란 때 남원 싸움에서 왜적에 체포되었고 포로에서 탈출한 이후 41세 때에는 황해도 수군절도사, 그 후 정인홍의 모함으로 군산으로 좌천되었다가 병 때문에 사직하고 고향 나주로 돌아와 광해군 14, 56세에 별세하였다

 

/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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