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마을 2

<사진설명>관봉사

영풍마을 입향조인 둔은공 노종주가 봉안돼 있는 관봉사. 이곳에는 함평노씨 시조인 문충공 노목, 중시조인 무열공 노신, 관암공 노홍, 금계공 노인 등의 행장이 함께 봉안돼 있다.

세상을 한탄하며 산수에 유랑하다 세상을 뜬 둔은공(遯隱公)

오직 공()의 심정을 토()하는 글 한수가 세상에 전할 뿐!

 

관봉사(冠峯祠)

영풍마을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 한 복판에 자리한 함평노씨 문중사우인 관봉사를 만나게 된다. 관봉사는 1968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옆에는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 술유재(述裕齋)가 있다. 1925년에 창건되었는데 내부에는 술유재기(述裕齋記)를 비롯 운차(韻次) 7수 등의 편액이 걸려 있고, 건물 후원에는 마을나무로 지정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관봉사에는 함평노씨 시조인 문충공 노목, 중시조인 무열공 노신, 11세손인 둔은공 노종주, 관암공 노홍, 금계공 노인 등 다섯 분의 행장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에서 둔은공 노종주가 영풍마을 입향조이다. 그는 전남 나주 거평방(문평면)에서 태어났다. 힘이 장사였으며 무과에 급제한 후 정삼품인 선전관을 역임했다.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1453) 후 세조 즉위에 반발하여 단종복위와 금성대군 추대운동을 도모했으나 실패하였다. 금성옥에 갇혔다가 감옥을 부수고 탈출하여 영암 은적산에 은거하다 일생을 마감했다. 여기 함평노씨 대종회의 도움을 얻어 둔은공과 관암공의 행장을 소개한다.

 

둔은공(遯隱公) 노종주 추모글

함평노씨(咸平魯氏) 시조(始祖)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노목(魯穆)11세손으로 7세 무열악은공(武烈岳隱公)의 현손(玄孫)이며 8세 현감공(縣監公)의 증손(曾孫)이시다자는 종주(宗周)요 호는 둔은(遯隱)이며  1,429년 전남 나주시 문평면 거평방(居平坊)에서 출생하셨다.

()은 어려서부터 자상(資相)이 웅위하고 여력(膂力)이 절륜(絶倫)하여 무과에 급제하시어 선전관(宣傳官)으로 재임 중이던 1,455년 단종(端宗)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셨다이듬해 여름 사육신(死六臣)이 단종 복위를 모의(謀議)하다가 참형(斬刑)당하고 그 다음해인 1,457년 가을에 순흥부(順興府)에서 귀양 살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부사(府使) 이포흠(李甫欽)과 단종복위를 밀로(密謀)함에 평소의 공()의 기절(氣節)과 지략(智略)을 잘 아는지라 비밀히 격문(檄文)을 보내와 함께 계획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금성대군과 이공(李公)은 안동옥(安東獄)에 갇혔다가 사사(賜死:사약을 받아 죽음)되고 공()은 금성옥(錦城獄)에 체류(逮縲:잡아다가 오라줄에 묶어 가두다)되었다이때 공()28세로 분함을 참을 수 없어 할 일을 못하고 구차하게 죽는 것 보다는 후일 기회를 기다렸다가 다시 도모(圖謀)함이 옳다고 여기어 파옥(破獄:옥을 부수고) 탈출하시고 낭주(朗州) 은적산(隱蹟山)에 숨어 살며 기회를 기다렸으나 사세(事勢)가 어그러짐을 깨닫고 세상을 한탄하며 산수(山水)간에 유랑하시다가 어디서 세상을 뜨셨는지 모른다.

오직 공()의 심정을 토()하는 글 한수가 세상에 전할 뿐이니 슬픈 마음 어찌하랴!

 

"상자속의 용이 분노하여 큰 소리 치며 일어나리라

 산속 싸리문(山扉)밖에 원통한 새 울음소리 들려오니

 어인 눈물인 고 외로운 신하 잠시() 눈물 거두고()

 임금님이 내려주신 용 그려진 옷에 절()하고

 철갑옷(銕衣) 어루만지니 한 밤중의 슬픈 노래 소리

 전부 사라지네."

 

   ! 슬프도다! ()의 숨결이 들리는 듯 하는 은적산 아래 사당을 세워 기리니 자손들은 머리 숙여 흠모(欽慕)함이다.(함평노씨 대종회)

 

관암공 노홍의 행장

공의 이름은 홍()이며 자는 여신(汝信)으로 1561109일 전남 순천시 주암면 갈마리에서 출생하셨고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셨다공은 체격이 장대하고 건장하며 소년시절부터 무용과 궁술이 능란하였다.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남도포만호(南桃浦萬戶)였던 공은 1583년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 우수영에 남천부장(南薦副將)으로 보임되었고, 이선장(二船將)으로 159252일 이순신의 함대에 승선하여 해전에서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어서 광주목사 권율과 이치전투와 행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대승하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격퇴하였다. 곧바로 남도포진으로 돌아온 공은 병사 황진, 수사 위대기와 왜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렷다

1600년 무과에 올라 훈련원 부정이 되었고  16026월 해양방어를 위해 통영과 좌수영첨방으로 출선하여 당포(唐浦:통영)에서 일본군 선단을 크게 격파시켰다그로 인해 선조당포전양승첩지도(宣祖唐浦前洋勝捷之圖)를 전공으로 하사하였다이 해전 전승의 포상으로 원종공신 이등정란공신에 중훈대부 보국장군이 되었다.

1605924일 도원사(都元師) 한준겸이 노홍(魯鴻)의 단선(丹船)이 매우 근실하다고 병조판서에 장계를 올린 보고서를 좌부승지 최렴이 선조 임금께 보고하자 우수한 장군은 발탁하여 변장(邊將)으로 승진시키고 수령으로 제수받았다(선조실록 25112)

 

그후 무오년 후금이 명나라를 침공하자 조정에서 명나라 사르허(深河)전쟁에 전라도 진영장(鎭營將)과 충무공 김응하와 함께 161932일 공은 부차령 1차 전투에서 후금의 철기병 600여명을 섬멸하고 수도 흥경 서쪽까지 진격하였다이틀 뒤인 343만여 철기병과 전투 중 중과부적으로 김응하 변덕일과 함께 순절하였다.

1619년 조정에서 공의 순국정충을 태성쌍충이라 하고 자헌대부 지의금부사(資憲大夫 知意禁府事) 노홍에게 증() 순충적덕(純忠積德) 보조공신(補祚功臣) 판의금부사능나군(判義禁府事綾羅君)으로 공신훈록(功臣勳錄)하였다.

사적은 남도포석성에 노공 홍 선정비(魯公 鴻 善政碑)와 전북 완주 이치(梨峙:배티재)에 있는 황진장군전적비(黃進將軍戰績碑)에 등재되어 있고 신종황제제문(神宗皇帝祭文)이 대동보에 등재 보존되고 있으며 당포전양승첩지도가 전남 지방문화재 25호로 지정되어 국립 진주 박물관에 임대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전남 나주시 문평면 거평사(居平祠)와 전남 무안군 해제면 학산사(鶴山祠). 전남 영암군 서호면 관봉사에 배향되어 있다.

 

묘는 장흥군 관산면 월송리 부용산(芙蓉山) 동편 수리재에 배 장흥위씨(配 長興魏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시향제(時享祭)는 매년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에 모시고 있다.(함평노씨 대종회)

  

/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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