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풍리 영풍마을

<사진설명>영풍마을 전경

함평노씨 집성촌이었던 영풍마을의 아담하고 정갈하게 쌓인 골목길 돌담길이 정겹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은 시작된다

3월부터 청룡리 노동마을을 시작으로 은적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순례를 떠난 지 10개월 만에 선사주거로의 끝에 이르렀다. 선사주거로는 독천 삼거리 노정로에서 시작하여 영모정, 신흥리, 괴음마을을 지나 장천리 선사주거지까지 이르는 길로, 영암지역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 길은 말 그대로 선사시대로 통하는 길이다. 가는 곳마다 여러 기수의 고인돌이 남아 있고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가 보존되어 있다. 원래 계획이 선사주거로를 거쳐 서호로를 걷는 것이었으니 이제 장천리와 엄길마을을 끝으로 반환점을 통과했다.

앞으로 걷게 될 서호로는 장천마을에서 영풍리, 신풍리, 소산리, 소흘리, 송산리, 남하동을 거쳐 성재리에 이르는 길이다. 이 서호로는 은적산 기슭을 따라 굽이치며 크고 작은 마을들을 품었다 놓았다 하면서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여기저기로 이어준다. 상은적산과 하은적산이 남과 북을 연결하면서 기슭에 둥지를 튼 마을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데 골골마다 산봉우리를 넘어 매월리·미교리·태백리로 넘어가는 샛길이 있고 전설이 있다. 서호로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마을은 쌍풍리 영풍마을이다.

 

신풍리와 영풍리 이름에서 따온 쌍풍리

먼저 마을지에 나와 있는 쌍풍리에 대한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시대에 영암군 곤이종면(昆二終面) 지역이다. 19144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영풍리, 신풍리, 월평리(月坪里), 수양리(水良里)를 병합하여 곤이종면 쌍풍리로 개설되었다. 그 당시에 신풍리(新豊里)와 영풍리(永豊里)의 이름에서 풍() 자를 따와 쌍풍리(雙豊里)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후 1930년 곤이종면이 서호면으로 이름을 바꿈에 따라 서호면 쌍풍리가 되었다. 서호면 중앙부에 위치하며, 북쪽은 서호면 소산리, 남쪽은 서호면 장천리, 동쪽은 군서면 모정리에 경계를 맞대고 있다. 인구는 총 163세대, 350[남자 157, 여자 193]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 마을은 월평 마을, 신풍 마을, 수양 마을, 영풍 마을, 학파동 마을이 있다.

상은적산의 줄기를 이어 받은 관봉[290m] 왼쪽에 위치한다. 마을은 구릉 지대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주변부는 평지로 논밭이며, 왼쪽에는 학산천이 흐르고 있다. 저수지로는 상은적산 골짜기의 물을 받아 모은 영풍 저수지와 신풍 저수지가 있다. 문화재로는 영풍 마을에 고인돌 7, 신풍 마을에 고인돌 3기가 남아 있다.”

 

영풍(永豊)마을 - 함평노씨 집성촌

풍마을은 장천 삼거리에 있는 전씨충효문(全氏忠孝門)에서 서호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500여 미터 거리에 있다. 이 마을은 원래 함평노씨 집성촌이었다. 그래서 영풍마을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함평노씨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함평(咸平)은 전남에 있는 지명으로 함풍(咸豊)과 모평 2()의 합명(合名)이다. 함풍현은 본래 백제의 굴내현(屈乃縣)인데 신라때 함풍현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 때 모평현으로 하였다.

함평노씨(咸平魯氏)의 시조 노목(魯穆)은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문하시중에 오르고 함풍군(咸豊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이 함평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으며, 함풍군 신()의 아들 3형제 대에서 3갈래로 나뉘어 장자 성안의 계통은 나주파로, 둘째 희안의 후손들은 무안파, 막내인 유안은 함평파로 갈리었다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목()의 증손 관도가 고려 때 수문전 태학사를 지내고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라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신(: 시조의 7세손은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평(討平)하는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올라 상장군이 되고 함풍군을 습봉(襲封)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막하에서 무공을 세워 원종이등공신에 책록된 홍()은 훈련원 부정(副正:3)을 지냈으며 정유재란 때 당포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시켜 공을 세운 대방·대련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함평노씨 족보)

 

원래 이름은 장복동(長伏洞)

영풍마을을 찾아가는 날은 겨울날씨 답지 않게 따사롭고 포근했다. 마을입구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북서쪽으로 은적산이 바람을 막아주고 동남쪽으로 제법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농촌마을이다. 은적산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마을회관 곁으로 흘러지나가고 산기슭에는 감나무와 매실나무와 같은 유실수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마을 뒤로 우뚝 솟아있는 은적산 관봉(冠奉)을 중심으로 마을회관에서 함평노씨 사당인 관봉사까지 돌담길이 이어져 있다. 마을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장동마을 전남도씨의 도움을 얻어 영풍마을에 거주하는 노대언(82) 어른을 찾아뵈었다. “내가 아는 것이 머 있어야제.” “그래도 이 마을 최고 어른이라고 들었습니다. 마을 유래에 대해서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함평노씨 족보를 펼쳐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 마을은 함평노씨 집성촌인데 우리 서호면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올시다. 노동마을의 밀양김씨, 엄길마을의 천안전씨, 성재리의 전주이씨들도 우리 노씨보다 늦게 들어왔어요. 나는 시조이신 목자 할아버지(노목)29세손입니다. 우리 마을 입향조는 11세손인 둔은공 할아버지(노종주)인데 사연이 길어요.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에 비분강개하여 금성대군과 힘을 합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이 되었어요. 그때 나주 금성감옥에 갇혔는데 탈옥을 했어요.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감옥을 부수고 탈출을 한 것이지요. 그때 이 은적산에 와서 숨어 살면서 후일을 도모했으나 다시 기회는 오지 않았고 그냥 이곳에 은거한 것이지요. 그래서 어른()이 엎드려() 계시다가 돌아가신 곳이다라는 뜻으로 장복동(長伏洞)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영풍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 때 개명된 것이지요.”

이렇게 평온해 보이는 마을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역시 마을은 그냥 휙 지나쳐서는 안 된다. 마을 안길은 물론 샛길까지 구석구석 걸어서 답사할 일이다.<계속>

 

/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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