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수기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 발간 ‘눈길’
16세에 미쓰비시 탄광에 강제 징용된 한 퇴직 교사의 자필 회고록
지옥의 현장에서 목숨 건 탈출...격정과 눈물로 일제강제징용 고발

 

 

 

 

 

 

필자(사진 가운데) 부부가 초등학교 제자인 우승희 도의원과 금정출신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대표와 함께 최근 출간된 책을 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16살에 미쓰비시 탄광에 강제 징용

 

영암읍 망호리에 거주하는 이상업씨(李相業·88)의 일제 강제징용 수기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가 최근 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미쓰비시 탄광에 끌려가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이씨는 전직 교사출신으로 자신이 겪었던 강제 징용 수기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전남일보가 공동기획(소명출판,p154, 1만 원)했다.

 

당시 일제가 제정한 징용령에 의하면 만 17세 이상의 남자만 노무자로 동원됐지만 규정은 무시된 채 이씨는 16세였던 194311월경 강제 징용됐다. 이씨가 끌려간 후쿠오카현 미쓰비시광업 가미야마다(上山田) 탄광은 한 마디로 생지옥이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지하 15m 막장에서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속으로는 차라리 그 소년의 죽음에 모두 소리 없는 축복(?)을 보내고 있었다. 지옥 같은 노동과 굶주림과 구타에서 일찍 해방된(?) 그 소년의 죽음을 차라리 부러워하고 있었다. 지옥 같은 그 막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 곳을 이렇게 기록했다.

남의 집 머슴살이만 하다 주인집 아들 대신에 끌려왔다가 구타로 숨진 소년, 매서운 현장 감독의 호랑이 발바닥에 채여 뇌진탕으로 죽은 소년 등 죽어 나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사인은 한결같이 병사처리됐다. 그러나 차라리 그 죽음마저도 부러웠다.

동료들의 무참한 죽음을 목격한 열여섯 살 소년은, 그날 밤 처음으로 탈출을 결심했다. 차라리 도망가다 잡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까지 노예와 같은 굴종의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두 차례 탈출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고, 그때마다 초주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죽음과 절망의 공간에서도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세 번째 시도 끝에 마침내 탈출에 성공해, 1945년 광복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고향 전남 영암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격정과 눈물로 일제 강제징용 고발

 

이 수기는 전남일보가 광복 45주년을 맞아 공모한 일제 강제 징용 수기 공모전에서 당선된 입상작으로, 1990111일부터 56회에 걸쳐 소개된 바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실상이 인터뷰나 구술집 형태로 소개된 것은 있었지만, 피해자 본인이 직접 쓴 체험 수기는 매우 귀한 편이다.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에는 노예와 다름없었던 징용자들의 비참한 삶,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민중으로서의 고통과 설움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의 본원적 욕구,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행간마다 짙게 묻어 있다. 또한 저자가 당시의 기억을 떠 올려 직접 연필로 스케치한 그린 그림 4 점도 함께 책에 담아 그 의미를 더했다.

저자인 이씨는 1948년 영암남초등학교를 시작으로 1994년 덕진초등학교 영보분교에서 정년 퇴임할 때까지 33년 동안 교단에 몸담았으며, 현재 월출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고향, 영암읍 망호리에 살고 있다.

이제 일본 제국주의 실상을 기억할 수 있는 세대마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는 일제 강제 징용의 처참한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한편,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피는데도 귀한 역사적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애들아! 이 조국은 너희들의 것이다

정부가 국정 역사교과서를 통해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주장하고 있는 이때, 격정과 눈물로 쓴 저자의 마지막 말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저자 이상업씨는?

19281218일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살이던 19439월 징용 영장을 받고 일본 후쿠오카 가미야마다(上山田) 미쓰비시 탄광에 끌려가 굶주림과 폭압 속에 지하 막장에서 탄을 캐는 광부로 강제노동을 겪었다.

연이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뒤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세 번째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해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8년 영암남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영암초등학교와 금정초등학교 등을 거쳐 1994년 덕진초등학교 영보분교 정년퇴임까지 군복무와 영암군청 근무를 제외하고 33년 동안 교사로 재직했다. 서예와 그림 솜씨가 뛰어나 학생들을 지도하고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1951년 결혼하여 32녀를 두었으며, 현재 월출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고향 영암 망호리에 살고 있다.

문의: 이국언 상임대표(062-365-0815, 010-8613-3041)

저자 및 책 표지 사진은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1945-8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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