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길마을 15

 

 

 

 

 

 

<사진설명>반남박씨 묘역 비각

서호면 엄길리 130-14번지, 산소마을에 있는 반남박씨 묘역 비각. 이곳은 반남박씨 남곽공파 종중의 묘역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남곽공 박동렬과 후손들이 모셔져 있다.

  운중반월(雲中半月)의 명당에 남곽공의 종중 묘역이 세워진 산소마을

 

산소마을-반남박씨 선산마을

산소마을은 학파 제1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둑제라고도 했는데 반남박씨 선산이 있어서 산소마을로 불린다고 한다. 엄길리 천년수를 지나 왼쪽으로 100여 미터 가면 반남박씨 묘역이 나온다. 여기에 오래 묵은 비석 4기가 서 있다. 이 비석은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박동열, 박동열의 아들 박호·박정, 박동열의 손자 박세모를 기리는 비석이다. 지금은 비각이 설치되어 있다. 4기 가운데 군서 모정리 쌍취정기를 썼던 박동열의 행적을 다룬 비가 유독 눈길을 끈다. 이른바 박동열 신도비이다. 박동열 신도비(朴東設 神道碑)1694(숙종 20)에 세워졌으며, 신흠(申欽)[1566~1628]이 비문을 짓고, 민유중(閔維重)[1630~1687]이 전액(篆額)을 썼으며 박태유(朴泰維)[1648~1696]가 글을 썼다.

 

박동열(朴東說)[1564~1622]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열지(悅之), 호는 남곽(南郭)과 봉촌(鳳村)이다. 박조년(朴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박소(朴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박응복(朴應福)이며, 어머니는 증 좌승지 월당 임구령(林九齡)의 딸이다. 동생이 박동량(朴東亮)이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했고 신념을 갖춘 강직한 인물로 평가된다. 신흠이 쓴 신도비에 그의 행적이 자세히 나온다. 국역문은 너무 길어 중략하여 소개한다.

 

신흠(申欽)이 쓴 박동열 신도비(朴東設 神道碑)

신흠(申欽)이 성년이 된 무렵에 서울에 유학하던 중에 더불어 사귄 바는 다 한때의 상류인데, 어떤 사람은 행실로, 어떤 사람은 재주로, 어떤 사람은 글로 사적(仕籍)에 통하고 그 장점을 보여서 이름난 사대부(士大夫)가 되었으나, 크게 닦은 기량과 원만히 이룬 덕이 가라앉혀도 맑아지지 않고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아서 문식(文飾)을 자랑하는 자가 만나면 그 능한 것을 잃고 기예를 이야기하는 자가 만나면 그 화려한 것을 잃는 것을 논한다면 모두 박공(朴公) 열지(說之, 박동열의 자())에게 양보할 것이다. 열지의 이름은 동열(東說)이고 호는 남곽(南郭)이다. 그 시조는 신라(新羅)에서 나왔고, 이산하여 나주(羅州)에 산 신라 왕의 후예가 반남 박씨(潘南朴氏)가 되었다. 고려 말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박상충(朴尙衷)이 곧은 절조로 저명하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좌의정(左議政)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訔)이 훈업(勳業)으로 알려졌는데 공의 8대조이다. 증조 박조년(朴兆年)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할아버지 박소(朴紹)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으며 일찍이 김안로(金安老)는 간사하여 다시 서용(敍用)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가 배척당하여 영남에 은둔하여 생애를 마쳤으며 호는 야천(冶川)이다. 아버지 박응복(朴應福)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반천 부원군(潘川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 임씨(林氏)는 선산(善山)의 명망 있는 집안이고 별좌(別坐) 임구령(林九齡)의 딸이며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 19)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릴 때에 높은 무리에서 뛰어나서 5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겉으로는 질박하고 어눌한 듯하나 속은 참으로 총명하며 외는 것이 빨라서 같은 글방에서 배우는 자가 아무도 앞서지 못하였으므로, 제부(諸父) 반성(潘城, 반성 부원군 박응순(朴應順))남일(南逸, 박응남(朴應南)의 호) 두 공이 더욱이 공을 중시하고 원대(遠大)할 것을 기대하되 오직 일찍 이름나는 것을 염려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글짓기에 종사하여 문장의 재능이 날로 진취하였다.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에 한성시(漢城試)에 입격하고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는데 유생(儒生)들이 감화되어 우러러 따르는 것이 덕이 있는 군자를 미리 보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었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진신(縉紳)에서 나와 파급된 자가 많았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날로 격렬해지고 성균관 유생들도 상소하였다.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는데, 공이 나아가 상소하게 되니,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근심할 것이 없겠다.” 하였다. 공이 과연 적합하였고 그때에 딴 사람이 없었다.(중략)공은 용모가 여느 사람보다 낫지 못하나 훌륭한 풍채가 엄정하고 그윽하고 기량이 넓으며, 천진하고 솔직하여 남에게 경계(境界)를 보이지 않으나 의기(義氣)가 격앙하면 금석(金石)처럼 확고하며, 침묵하여 스스로 지키고 망령되게 말하고 웃지 않으나 마음에 맞는 것은 승낙하고 어기지 않으며, 효성과 우애가 천품에서 나왔으나 쉬지 않고 수양하며, 정이 도탑고 화목한 것은 절로 되나 남들이 미칠 수 없으며, 장점을 칭찬하기 좋아하고 단점을 헐뜯기 싫어하며, 자신에게는 단속을 다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이 용서하며, 남들이 스스로 믿고 힘써 행하여도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공은 날마다 행하되 많아서 여유가 있으며, 세상에서 약고 공교하게 억측하여 스스로 잘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공은 하치않게 여기고 더럽혀지는 것처럼 대하였으니, 예전에 이른바 조용하고 공경한 장덕 군자(長德君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집안은 대대로 명예와 덕행(德行)을 이어받아서, 야천공(冶川公, 박소(朴紹))은 바른 도리와 굳은 절조에 학문을 더하였는데 소인의 공격과 동요를 받았으나, 마침내 상법(常法)이 있으므로 가정의 교훈이 변하지 않았으며, 공의 제부(諸父)도 다 독실한 행실이 있었다. 의인 왕후(懿仁王后, 선조비(宣祖妃) 박씨. 박응순(朴應順)의 따님임)이 명을 받아 국모(國母)가 되매 반성(潘城, 반성 부원군)이 포상하는 규례에 따라 봉해지고 뭇 종자제(從子弟)도 벼슬이 현달하였는데, 공이 그 사이에서 성실하고 근신하며 욕심이 없고 결백하며 무슨 일을 당하여도 혼란하지 않으므로, 집안의 젊은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다 공을 표준으로 삼았다.공은 글에 힘쓰지 않아도 문장의 운치가 본디 고상하였고 고서(古書)를 섭렵하였는데 한번에 두어 줄을 읽어 내렸으며 경사(經史)백가(百家)부터 명나라와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의 고실(故實)과 인물의 출처까지 조금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능히 절충하였으므로 박사(博士)장고(掌故)일지라도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고명(誥命)을 지으면 화려하되 능히 전아(典雅)하고 시를 지으면 청신(淸新)하고 법도가 있었다. 폐고(廢錮)되어 송추(松楸)에 살 때에 오성(鰲城) 이공(李公)도 은퇴하여 동교(東郊)에 있었는데 왕래하며 배회하였고, 이공이 귀양갈 때에 공이 준 절구(絶句),평생에 대나무가 뜻과 같더니 (平生竹如意)서로 자릉대2)에서 송별하도다 (相送子陵臺)하였다. 대개 사고(謝翶)가 문산(文山, 문천상(文天祥))을 보낸 일3)을 인용한 것인데, 조어(措語)가 슬프고 격렬하므로 사람들이 앞다투어 전송(傳誦)하였다.공이 별세하였을 때에 신흠이 지은 조사(弔詞)크게 질박한 진수가 섞여서 하나가 된 것이 도탑고 큰 것은 공이 그 완전한 것을 받았고 지극히 조화된 정신이 순수하게 넓고 두터운 것은 공이 진기(眞氣)를 얻었으니, 이름은 높을 것 없으므로 내실로 바로잡고, 행실은 화려할 것 없으므로 돈독하게 바로잡고, 말은 갖출 것 없으므로 정직으로 바로잡고, 재주는 민첩할 것 없으므로 중후하게 바로잡으며, 비단 옷을 입어도 그 문채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하고 소양을 쌓아도 그 바탕이 엷을세라 염려하였다. 공경스럽기는 만석4)(萬石)의 풍채요 묵묵(默默)하기는 양원5)(陽元)의 도량이다. ! 이 말이 과장이 아니다.” 하였다. 어찌 조석으로 만난 자가 없으랴마는, 공을 아는 것으로는 신흠만한 자가 없으니, 공의 신도(神道)에 신흠이 어찌 감히 글을 짓지 않겠는가? ()은 이러하다.세상에서는 일찍이 금세 사람은 옛사람만 못하다고 하여 왔으나, 공과 같은 이는 어찌 옛 현인(賢人)만 못하랴? 벗이 공의 명을 지어서 세 묘도(墓道)에 장식한다.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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