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용 *도포면 출생 *전 농협대학 겸임교수 *전 농협중앙회 해외협력실 과장 *목포 문태고 교사

8월의 무더위 속에서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던 리우 올림픽이 우리나라가 금메달 9개, 은메달 3개, 동메달 9개로 ‘세계 8위’의 성적을 거두고 끝났다.

 혹자는 이런 결과를 절반의 성공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세계 8위라는 숫자와 순위가 어리둥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참가국들의 선수들이 딴 메달 수를 기준으로, 그것도 금메달 수를 우선시하면서 참가국들의 순위를 매기는 일은 올림픽 정신에도 맞지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산출 근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아리송할 뿐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매년 전국체전에서 각 시도별로 순위를 집계하는 방식과도 거리가 한참 멀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적 우선주의의 서열화 분위기의 투영이 아닌가 싶다.

한 TV방송의 교양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강사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는 해외에서 유학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한국인들은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표현할 수단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오직 있다면 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교성적으로 자신을 말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직장에서의 성과를 가지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상당부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을 바라볼 때 우선 먼저 눈이 머무는 것이 그 학생의 성적이다. 다른 많은 참고자료가 있을 터인데 관성적으로 맨먼저 학생의 성적에 눈이 먼저 간다.

그러고 나서는 곧바로 학생에 대한 이미지를 머리속에 그린다. 교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교사가 담당하고 있는 반의 평균이 몇 점인지, 학교에서 그 반의 시험성적 순위가 몇 위인지 하는 것이 교사를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얼마나 많이 학생들과 공감하면서 학생들의 창의성을 이끌어 내는지에 대한 평가척도는 아예 없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어느 학교의 입시성적이 얼마나 좋은지, 구체적으로 서울대학교에 몇 명이나 합격시켰는지, 성취도 평가에서 기초학력 미달학생이 몇 명이 나왔는지의 숫자로 나오는 평가가 지역사회에서 학교를 판단하고 서열화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학교붕괴’ ‘교실붕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아니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고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포함한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공교육의 실패’라는 문제가 왜 20세기 말에서 시작이 되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이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금의 공교육 시스템은 산업혁명과 국민국가의 탄생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국가들이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국민들에게 기본적인 문해 및 수리능력과 기초과학 지식으로 무장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중앙집중형 통제체제에 의해서 움직이는 국가와 기업의 목표를 잘 이해해서 생산성을 높여 줄 방대한 인적자원이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산업자본주의나 금융자본주의로 진화하면서 과학과 기술이 광범위하면서도 고도화되면서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목적에 부합한 현재의 공교육 시스템으로는 이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일이 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태어나면서부터 3차 산업혁명의 달콤함을 맛본 지금 세대들이 일방적인 지휘통제 메커니즘을 가진 이전 패러다임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교육 시스템은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되어주지 못해 온 것이다.

결국 산업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성장의 한계점에 도달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를 뒷받침 해주었던 공교육도 그 용도가 다하게 된 것이다.

사실, 교육이라는 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교육투자에 대한 편익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게 되면서 개인들의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산업자본주의의 성장이 멈추면서 또 사회적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편차가 심화되면서 경제는 성장하지만 고용이 줄어드는 상황에 빠진 현실이 우리교육의 방향과 방법에 회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지금 세계가 처한 상황은 산업자본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교육 시스템도 이에 맞게 변화해야 할 시점에 놓였다. 다만 교육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도할 것인지 아니면 뒷북을 칠 것인지가 문제로 남아있을 뿐이다.

지금의 학교 교육의 주된 역할이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평가기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자조적인 푸념을 듣는다. 사실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인터넷을 필두로 하는 매체의 발달이 지식전달의 한계비용을 거의 제로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전통적으로 학교가 하는 역할에 중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학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가 아닌 21세기 3차 산업혁명의 트렌드와 부합하는 전문적, 기술적, 직업적 교육을 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고급정보, 나노기술, 생명공학, 지구과학, 생태학, 시스템 이론, 재생가능 에너지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교육은 더 이상 결과를 중심으로 이를 숫자로 서열화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정중심의 창의적이 문제 해결능력을 갖춘 개인이나 집단만이 생존하여 번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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