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의 송/학산면 광암마을/전 농협중앙회 신용대표/전 농민신문사 사장/한일농업농촌연구소 공동대표
지금까지 74년을 살면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말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부모님 그리고 친지와 선생님 등 주위 사람들에게서 많은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그 말들은 사실 대부분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어떤 말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우선 4~5살 시절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농사를 짓는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 학교가 없어 공교육을 받지 못한 분이셨다. 당시는 부엌에서 장작을 태워 물을 데우고 툇마루에서 세수를 하는 시절이었는데, 세수를 다 하고 남은 뜨거운 물을 마당에 좍 버리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야단을 치셨다. 뜨거운 물을 마당에 그냥 버리면 흙 속의 지렁이가 죽는다는 말씀이었다. 마당에 지렁이가 있으면 발로 밟아버리거나 무시하곤 했던 터라 지렁이 죽는다고 야단치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진지한 표정으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말씀인 것 같기는 한데, 제법 자라도록 어머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된 것은 대학에서 토양학을 공부하면서다.
지렁이는 흙과 그 속에 있는 세균, 미생물, 동물 배설물, 식물 부스러기 따위를 먹는다. 먹은 것이 긴 창자를 지나는 동안 흙과 함께 소화되는데, 그 똥은 작물재배에 더없이 좋은 흙이 된다. 유전학자 다윈은 땅 속의 지렁이 굴을 ‘흙의 창자(intestine of soil)’라고 불렀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에 창자가 있다. 그 창자를 통해서 영양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지렁이는 두더지처럼 여기저기 땅 속을 들쑤시고 다니기에 흙 속의 공기 흐름을 좋게 하고 식물의 뿌리 호흡에도 큰 도움을 준다. 지렁이 굴을 흙 속의 창자라고 한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60종류의 지렁이가 서식하며, 지구상에는 7천여 종이 있다고 한다. 길이는 30㎝ 전후이고 긴 것은 3m나 되는 것도 있다. 흔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여 하찮은 것의 대명사로 여기지만, 한자로 지룡(地龍) 또는 토룡(土龍)이라고 하니 미물이 아니라 용처럼 훌륭하다는 표현인 것 같다. 지렁이와 한약재를 넣고 끓인 것을 토룡탕(土龍湯)이라고 하면서 약으로 먹기도 하고, 지렁이의 몸에서 혈전(血栓)을 예방하는 성분을 뽑아내 제약 원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생학에서 봐도 지렁이는 미물이 아니다. 지렁이는 암수 한 몸으로, 정자를 만드는 정소와 난자를 형성하는 난소가 모두 한 몸에 있는 자웅동체(雌雄同體)다. 하등동물이 대부분 자웅동체다. 하지만 지렁이는 제 난자와 정자가 자가수정을 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지렁이와 서로 정자를 맞바꾼다. 이는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사항이다. 이를 어찌 미물이라고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렁이가 없다면 우리의 생태계는 어떨까? 2015년 유엔(UN)은 ‘지속 가능한 개발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les)’를 선언했다. 지속 가능한 개발목표의 핵심사항은 경제성장, 사회발전, 환경지속성, 이 세 분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환경지속성이며 이는 지구 생태계의 보전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관한 사항이다.
지렁이 없는 지구는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인식해야 한다. 지렁이가 만들어 낸 흙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우수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원동력이 되는 중요한 흙이다. 좋은 흙에서 좋은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 흙은 생명의 어머니다. 우리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모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꿈에 지렁이가 나타나도 길몽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렁이 꿈에 관한 해몽들을 보면 요즘 말로 ‘대박’이 따로 없다. 가업이나 기업이 풍성해지고, 재물이 늘어나는 기쁨이 있으며, 개인의 발전이 이뤄지는 것은 물론 명예도 높아진다니 돼지꿈 부러워할 바가 아니다.
“뜨거운 물 마당에 마구 쏟지 마라. 지렁이 죽을라!” 70년 전 어머니께서 하신 이 말씀이 나의 전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 지렁이를 통해서 어머니는 흙과 자연과 지구를 말씀해주신 것이다. 요즘 신토불이(身土不二)니 로컬푸드(local food)니 하면서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는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가 존속하는 한 안고 살아야 하는 인류철학의 문제다. 21세기 우리가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삶도 지렁이를 미물(微物)이 아닌 영물(靈物)로 여기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