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를 즐기며 여생을 마치니 화려한 세월과 태평한 세상을 얻다

쌍취정기와의 운명적인 만남

네 분의 선산 임씨 어른들이 다녀가신 후 한 동안 그 우연한 만남에 대해서 생각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오셨을까? 여기는 마을 저수지와는 정 반대편에 위치한 지역인데다 진입로도 비좁은 언덕길이고 막다른 길목에 위치한 집이라서 외지인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인데...” 저분들은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오신 것이었고, 나는 지금껏 고향마을의 문화와 역사를 찾아 연구하던 참이었다. 마을 이름인 모정(茅亭)과 그 이름의 모태가 되었다는 쌍취정(雙醉亭)과의 관계를 몹시 알고 싶어 하던 필자의 마음을 헤아려 필경 조상님들이 이 분들을 보냈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가을 어느 날 종손 임선우씨가 약조한 대로 쌍취정기(雙醉亭記) 원문과 문곡 김수항이 쓴 중수기, 그리고 월당공 장남인 남호처사 임호와 관련된 자료를 전달해주셨다.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 지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렜다. 감사한 마음으로 봉투를 열고 쌍취정기를 꺼내어 한 글자 한 글자 빠짐없이 읽어 보았다. 쌍취정을 지은 월당 임구령과 형제들에 대한 소개로 시작되다가 후반부에 가서 모정(茅亭)과 쌍취정(雙醉亭)을 지은 구체적인 설명이 나온다. 첫 부분의 소개내용이 장황하긴 하나 이해를 돕기 위해 임선우씨가 보내준 쌍취정기 전문을 가감 없이 여기에 싣는다.

 

쌍취정기(雙醉亭記)

공의 성휘는 임구령(林九齡)이요, 호는 월당(月堂)이니, 위사공신(衛社功臣) 목사(牧使)요 증 호조판서공이다. 부친의 휘는 우형(遇亨)이요 시호는 충순(忠純)이니, 증 보작공신(補作功臣)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영사 부원군이요, 형은 억령이요 호는 석천 또는 하의이니, 우리나라 문장(文章)이고 관찰사이며, 차형은 백령이요 호는 괴마(槐馬)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니 정난위사공신 보국승록대부 숭선부원군이다.

()은 계자(季子)요 계제(季弟)로서 신유(辛酉)(1501/연산군 7)5월에 해남 사저에서 출생하고, 나이 34세에 출사하여 국가 포상의 공을 받고, 하사한 선물이 해가 갈수록 많아지니 그 성은이 비할 수 없었다. 처음 광주목사와 좌우승지에 임명되고 남원부사에 재임하니, 이에 그 부귀가 나라에 으뜸하고 곡물이 수만 섬이요, 노비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훈천양육(薰天梁肉)은 보신처세에 오히려 장애가 된 것임을 깨닫고 달 밝고 조용한 밤이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꿈에 엄군평(嚴君平)과 만나서 분수를 알고 용퇴할 방법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또 중국의 재상 범여가 벼슬을 그만 두고 망명을 하게 된 깊은 뜻을 마음에 새기면서, 우연히 영암 서구림에 들렸는데, 이곳은 바로 월출산 밑이며 서호의 위이고, 옛 고려의 국사인 도선이 살던 땅이며, 구거(舊居)에서 멀지 않고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곳이다. 인간만사를 헤아릴 제 세상에서 제일 급선무는 생활경제의 길밖에 없다 하고, 진남포 일대에 축대를 쌓기로 기획하여, 창고를 개방하고 노비와 장정을 투입하여 마침내 천여석지기 토지를 개간하였으며, 한편에는 못을 파고 한쪽에는 정자를 지어 못에는 연꽃을 심고 고기를 키워서 운치를 아름답게 하고, 고기가 헤엄쳐 놀도록 꾸몄다. 정자는 처음에 모정(茅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요임금의 모자불치(茅茨不侈)라는 고사의 뜻을 취했던 것이며, 다시 쌍취정이라고 이름하여 형제 동락의 뜻을 담았으니, ()와 정()의 두 가지 아름다움이 서로 어울려 볼수록 더욱 아름답고, 들녘에서는 공을 칭송하는 격양가가 울려 퍼지고, 정자에서는 임금을 사모하여 멀리서 우러러 은덕을 따르는 노래를 부르며, 거문고를 스스로 즐기며 여생을 마치니, 화려한 세월과 태평한 세상을 이 정자에서 가히 얻었다 할 것이다. 갑인년(甲寅年:1614) 七月 朴東說 기술함

* ()

훈천양육(薰天梁肉) - 대들보에 매달은 많은 고기를 굽는 연기가 하늘을 진동시킨다는 뜻.

엄군평(嚴君平) - 중국 촉()나라의 서울 성도(成都)의 점장이인 엄준(嚴遵)을 말한다. 충효와 신의로 사람들을 가르쳤고 날마다 백전(百錢)을 얻으면 곧 가게를 닫고 노자(老子)를 읽었다 함.

범려(范蠡) 망명 - 중국 월나라 제상인 범려가 구천왕을 도와 오나라의 부차왕을 죽이고 공신이 되었으나 나중에 용퇴할 때를 판단하여 제나라에 망명한 고사를 일컫는다.

모자불치(茅茨不侈)- ()임금이 모자(茅茨)(띠로 지붕을 인 허술한 집)에 살며 사치하지 않음을 말한다.

 

모정(茅亭)모자불치(茅茨不侈)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

쌍취정기 전문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모정(茅亭)이란 이름이 생겨난 이유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임구령 목사가 진남제를 구축한 다음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을 때 처음에는 초가지붕을 한 정자, 즉 모정(茅亭)을 지었다가 나중에 형제간의 우애와 동락의 뜻을 담은 쌍취정을 지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임목사가 큰 언덕 아래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었는데 조정으로부터 너무 호화스럽다는 지적을 받아 기와지붕을 초가지붕으로 바꾸고 모정(茅亭)이라 했다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었다. 영암문화원에서 발간한 지명 유래지에도 이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쌍취정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오히려 거꾸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초가 정자가 먼저이고 나중에 쌍취정이 생긴 것이다.

이로써 원래 비죽(飛竹)이었던 마을 이름이 모정(茅亭)으로 바뀐 연유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비죽(飛竹)은 도선국사 탄생설화와 관련된 이름인데, 바위 위에 버려진 도선국사를 보호하기 위해 비둘기들이 날아간 지역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임구령 목사가 동호리와 양장리 원머리를 잇는 진남제를 축조하여 지남들을 조성한 때가 1540년이었고 현재 모정마을 달맞이 언덕 아래에 연못을 파고 쌍취정을 지었던 때가 1558년이었다. 비죽은 모정에서 신흥동으로 넘어가는 구릉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 이름인데 당시에는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모정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비죽이라고 부른다.

 

/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사진설명>옛 쌍취정 터에서 바라본 연못과 월출산. 월당 임구령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지금의 모정마을에 못을 파고 정자를 지었는데 처음에는 초가지붕의 정자의 뜻을 지닌 모정이라 했다가 나중에 형제간의 우애와 동락의 뜻을 담은 쌍취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