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의 송/학산면 광암마을/전 농협중앙회 신용대표/전 농민신문사 사장/한일농업농촌연구소 공동대표

 

내 고향 광암 마을을 주제로 세 번째 글을 쓴다. 이야기의 대상이 광암 마을이지만 꼭 광암 마을만 한정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암군 내의 마을이 다소 차이는 있지만 같거나 비슷한 환경일 것으로 생각하고 영암군의 모든 마을이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소비시대라고 한다. 문화는 경작한다는 의미의 영문자(culture)를 사용한다. 그래서 농업(agriculture)이 있는 농촌마을이 사실은 문화생활이다. 그래서 농촌마을이 21세기의 생활의 터전이 될 것으로 필자는 확신한다. 그런 마음을 갖고 광암 마을의 역사문화 유적을 여기 소개해 본다.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미륵이 떡 버티고 있어 경건한 마음을 요구하는 듯 하다. 이 미륵의 이야기는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고, 전설의 고향으로 소개된 적도 있다. 내용은 이렇다.

지금부터 약 300년 전이다. 조선 선조 때 광암 마을에 정 부자가 살았다. 정 부자는 자식이 없다가 늘그막에 아들을 하나 얻어 이름을 천자(天子)로 지었다. 천자가 열 살이 되어 결혼했으나 스무 살이 되도록 정 부자는 손자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천자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인 것을 깨닫고 처지를 한탄하였지만, 마음이 착하여 마을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자기 일처럼 도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천자를 가리켜 구민(救民)고자(孤子)라고 불렀다. 천자는 후손을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광암 뒷산에 약4.54m의 미륵 비를 세웠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미륵 비에 기도를 드리며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끝내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광암 사람들은 지금도 천자의 유언대로 제사 일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하고, 음력 정월 14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작년부터는 제정골 다솔정사의 금원 스님의 주제 하에 마을주민 모두와 출향인의 이름을 부르며 가정의 평안과 안녕 그리고 국가의 통일과 발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미륵비의 바로 뒤편 50m 사방에 고인돌이 40 여개 산재해 있다. 고인돌은 세계 도처에 있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다. 고창과 화순에 있는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돌의 규모로 보아 막강한 힘을 갖는 지배계급의 무덤일 수 있다. 그렇다면 광암 마을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식량생산과 생활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미륵은 공부의 신이므로 여기에 지성으로 기도를 드려 많은 출중한 인재가 태어난 것으로 주민들은 믿는다. 자녀들의 건강을 기원하고 국가의 동량이 될 인재가 태어나기를 비는 사람들이 많다. 또 주민들은 미륵은 출산의 신이므로 기도하면 출산의 기쁨을 준다고 믿는다.

요즘 스토리텔링이 유행이다. 이야기가 꼭 사실일 필요는 없다. 뜻을 쉽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면 된다. 미륵과 고인돌에 관련한 이야기를 좀더 발전시켜서 광암마을을 외부에 알려서 지역활성화의 기폭제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 외에도 광암 마을은 스토리텔링을 담아서 전국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역사와 문화가 많다. 마을 앞의 생태하천과 뒷또랑, 앞또랑 등을 복원하고 마을의 역사문화를 담아 역사문화탐방과 물놀이 등 자연체험 마을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요즘 유행하는 농업의 6차산업화도 가장 적합한 지역이 바로 농촌마을이다. 21세기에 지속 가능한 생활문화가 여기서 꽃이 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