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영암읍 장암출생/호남미래포럼 공동운영위원장/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대표/국가인권위정책자문위원

필자의 고향 마을 마당바우(장암)는 월출산의 동쪽 봉우리들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마주보는 위치다. 필자는 어린시절 자연스럽게 아침저녁 월출산을 바라보며 컸다.

주변에 다른 산들이 많았지만 그래서 필자는 산이라면 월출산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강렬한 인상 때문에 철이 든 다음 월출산은 나에게 자연스러운 '큰바위 얼굴'이 되었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해 등하교길에 유달산을 바라보고 몇년을 지냈다. 전체의 분위기는 월출산과 비슷하지만 유달산은 국민학생의 눈에도 규모가 너무 작았다.

월출산 만큼의 강렬한 느낌은 받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국민학교 4학년때 목포 앞바다의 한 섬으로 전학해 3년 동안 바다 경치를 주로 보다가 광주의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무등산을 처음 대면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적잖이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월출산의 기발한 봉우리와 준험한 산세에 익은 내 눈에 무등산의 둥글고 무던한 모습은 조금 과장해 말하면 산같아 보이지 않았다.

높이는 월출산 보다 높다는데 느낌은 큰 야산 같아서 어딘가 아쉽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바뀌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광주에 살게 되면 누구든 언제 어디서나 무등산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 무렵 어느날 국어시간에 선생님께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져 주셨다.

"늘 무등산을 바라 보거라. 그리고 배워라. 참으로 좋은 산이다. 이런 산은 흔하지 않다. 무등산을 보고 닮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여러분 모두가 훌륭한 인재가 될 것으로 믿는다"

표현이 꼭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의 말씀이셨다. 말씀을 하실 때의 분위기가 참으로 진지해서 가슴에 그대로 와닿았다. 선생님의 말씀을 계기로 무등산에 대한 필자의 선입견은 깨끗이 씻겨 나갔다. 야산만 같았던 무등산의 능선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월출산의 뺴어남과는 다른 무등산의 두텁고도 실한 육감이 안으로 파고 들었다.

무등산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내가 뜬 장중한 등성이의 아름다움이다. 훗날 미당 서정주의 시 '무등을 보며'를 접하고 나서 더욱 선명해진 이미지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 같은/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까지야 다 가릴 수있으랴/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 밖에 없다..."

, 햇살에 드러난 그 갈매빛 등성이의 신비롭기 까지한 빛남, 광주라는 지명의 연원이 된 그 이미지를 말로 다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시인은 왜 하필 가난과 새끼 기르는 일을 무등산의 이미지와 연결시켰을까.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만 6년을 광주에 살면서 봄 가을 소풍을 무등산으로 여러차례 갔지만 중턱 정도에서 놀다 오는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의재 허백련 선생의 농원을 지나면서 그 분의 그림 이야기를 들었고 한국 금융업을 개척한 현준호 선생의 주인잃은 별장도 볼 수있었지만 그 분들이 그들의 시대에 어떤 비중의 인물이었는지를 제대로 알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중학교 2학년 쯤이던가, 늦가을에 전교생이 토끼몰이를 갔던 일이 선명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배고픈 다리를 지나 계곡을 한참 올라 커다란 등성이 하나를 둘러싸고 전교생이 고함을 지르며 토끼를 몰았는데 성과물은 토끼 한 마리였던지 두 마리였던지 조금 초라했다. 그날 날씨가 꽤 쌀쌀했다. 억새 우거진 무등산 등성이를 소리지르며 오를때 느꼈던 야성의 기운과 차가운 바람의 감촉은 지금도 아련히 마음속에서 설렁인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작 6년동안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무등산 정상까지는 가보지를 못했다. 입석대 아래까지 간 것이 가장 높이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광주를 떠났다. 사회인이 되고 서울 사람이 되었다. 무등산도 월출산도 일상의 생활에선 멀어졌다. 대신 두 산은 고향을 상징하는 마음 속의 이미지로 솟아올라 세월과 함께 더욱 또렸해져갔다. 서울에서 광주를 거쳐 영암으로 갈 때, 반대로 영암에서 광주를 지나 서울로 올 때 필자는 지금도 무등산과 월출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가슴이 뛴다. 심신의 저 깊은 곳에서 에너지가 다시 충전되는 감흥을 느낀다. 산이 시야에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계속 차창을 응시하는 나를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월출산과 무등산, 내 영혼의 요람이자 에너지와 영감의 원천인 아버지 어머니 같은 두 산은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민주화'가 시대의 화두이던 80년대 필자는 언론사 동료, 후배들에게 말하곤 했다. "광주는 지명이 아니다, 우리의 미래, 모두의 이데아다".

광주, 호남인들의 비원과 정신의 전국화, 세계화가 더욱 빠른 속도로 진척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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