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꽃 향기가 가득한 싱그러운 5월이다.
필자는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를 찾는다. 모교인 이 대학 캠퍼스 수선관 강의실에서 석사과정 대학원생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해서다. 이 시간만큼은 다시 20대 청년으로 되돌아가는 학창시절의 기분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강의실에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기쁘고 설레기까지 한다. 이 대학을 졸업한지 40년이 지났다. 가끔씩 후배 제자들을 만나서 강의하는 순간은 교수인지 젊은 학생인지 착각될 때도 있다. 필자는 60년 중반에 이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군 복무까지 합쳐 8년만인 70년 초반에 졸업했다. 처음 입학 때에는 사법고시 후 검사가 꿈이었다.

그러나 너무 가난해서 고시공부를 할 수 있는 생활여건이 안 되었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가 시골에서 아들의 학비를 보내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필자는 학비와 생활비를 직접 마련해야만 하는 고학생이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적성에 잘 맞는 방송기자의 길을 택했다. KBS 기자 30년, 대학 교수 8년 정년 경력으로, 2011년 이 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초빙교수로 4년 째 강의하고 있다. 40여 년 전 60년 대 중반의 학창시절은 모두가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 힘들게 공부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다. 겨울철에는 도시락을 2개씩 싸와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면서 공부에 몰두했다.

식사 때마다 도서관 안의 대형연탄난로 위에는 찬밥을 데우기 위한 양은 도시락들이 10개 이상 높이로 차곡차곡 쌓인다. 도시락 반찬은 대부분 커피를 담았던 빈 유리병에 가득 담은 배추김치뿐이였지만, 도시락의 맛은 정말로 꿀맛이었다. 또, 대학교 1학년 신입생 때 미팅이 추억으로 남는다. 당시 법과대학 1학년 학생 20여명은 이화여대 약학과 학생 20여명과 미팅했다. 미팅 장소는 북한산성 유원지였다. 번호표를 뽑아 짝을 만난 후 자기 소개와 취미, 특기 등을 자랑하며 대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젊은 청춘의 남녀 대화에 대한 즐거움을 경험했다.

당시 대학은 남학생들은 교복차림이었고 여학생들은 캐주얼차림이었다. 대부분 미팅에서 만나 서로 짝을 이루어 즐거운 대화를 나누지만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당시 남녀 대학생들의 데이트는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이나 짬뽕 한 그릇씩 먹는 것이 전부였다. 남학생들은 짜장면 값을 지불할 수 없어 여학생 모르게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카운터에 손목시계를 주인에게 몰래 맡기는 일도 많았다.

60~70년대 대학생들은 이렇게 대부분 가난하고 어려웠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는 중,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입주과외로 먹고 자면서 학비를 조달했다. 또는 중, 고등학생들의 그룹과외를 어려곳에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어렵게 공부했다. 필자는 고학으로 대학졸업 후 방송기자가 되면서 새로운 인생 목표를 세웠다. 다시는 후손들에게 가난이 없고 마음껏 공부해서 성공할 수 있는 좌우명 4개를 만들어 새롭게 도전했다.

첫째,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자. 둘째, 시간을 아껴 보람 있게 쓰자. 셋째, 주어진 환경에 1인자가 되자. 넷째, 미래를 준비하면서 현재를 살자다. 특히 넷째의 좌우명을 실천하기 위해 엄청난 인내와 고통을 참아가며 무섭게 도전했다. 앞으로 5년, 10년, 20년, 30년 이후 내 인생의 삶에 대한 설계도에 맞춰 현재를 집요하게 살았다. KBS 정년은 58세다.(지금은 60세로 연장됐다). KBS 정년 후 어떻게 살 것인가? 정년이 65세인 대학교수가 되자고 다짐했다.

30대 초반 외신부 기자 시절이다. 국내에 하나 뿐인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특수대학원 석사과정 야간에 입학했다. 일주일에 3일 퇴근 후 열심히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해 4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보도국 차장 시절 성균관대 신문방송 대학원 박사과정에 3수를 해 입학했다. 박사 과장 입학시험 필수과목인 제2외국어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종로에 있는 일본어 학원 새벽반에 3년 간 다녔다. 보도제작국 차장 시절인 45세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부장이 된 50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보도국장과 동료부장들이 필자의 박사학위 취득 소식을 KBS 뉴스에 보도해 주었다. 박사학위만 있다고 교수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논문이나 저서 등 연구 실적이 있어야 한다.

또 다시 현역기자로 근무하면서 교수가 되기 위한 강한 집념으로 방송보도 실무저서 3권을 집필하고 출판기념회도 3차례나 열었다. 이 같은 결실로 2004년 KBS 정년 6개월을 앞두고 교수공개 채용 시험에 응시해 3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언론미디어 학과 정교수가 되었다. 방송기자 30년 경력으로 쌓은 실무와 이론으로 8년 동안 강의를 했다. 이 밖에도 KBS 현직에 있으면서 대학교수 정년후에 서예학원 원장이 되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바쁜 기자생활 가운데 20년 이상 서예학원에서 지필묵으로 한자 서예를 공부했다. 서예전시회에 꾸준히 출품도 하면서 대한민국 서예대전인 국전에 두 번 입상했다. 하지만 교수정년을 하자마자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초빙교수와 경기대학교 외래교수로 또, 출판사 부회장, 케이블 TV 두 회사에서 고문을 맡았기 때문에 현재의 업무가 끝나면 중견 서예가의 꿈을 실현하기로 했다. 벌써 7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미래를 위해 현재를 준비하며 살았던 과거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 현재를 바쁘고 즐겁게 보람 있는 노교수의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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