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철 영암관광지킴이 회장 영암문인협회 초대회장 민주평통 영암군협의회장 역임 한국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월출산의 중심에 있는 구정봉은 영암의 지명이 유래된 곳이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구정봉 아래에 있는 동석(動石)으로 인해 ‘영암’이라는 지명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구정봉의 웅대한 ‘큰바위얼굴’이 바로‘靈巖(신령한 바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만큼 영암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월출산의 중심에 있는 구정봉(711m)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불려진 이름으로 천황봉(812.7m)과 마주하고 있으며, 향로봉(744m)에 이은 세 번째 봉우리이다. 월출산의 구정봉은 향로봉 쪽에서 보면 산봉우리라기보다 작은바위 언덕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를 깊이 헤아리고 살아온 우리의 선현들은 구정봉을 바위로 가볍게 보지않고 월출산의 정기가 응어리진 대표적인 산봉우리로 주목했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철종12)에 제작한 우리나라의 대축척 지도인 대동여지도에 보면, 영암을 표시하면서 월출산의 주봉을 ‘구정봉(九井峯)’으로 명기하고 그 곁에 ‘동석(動石)’을 함께 표기해 놓았다. 온 국토를 몸으로 그린 그는 구정봉과 동석으로 월출산 정기를 꿰뚫어 보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영암군 산천조 월출산 구정봉항에는 구정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꼭대기에 바위가 우뚝 솟았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만 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서면 20여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이 오목하고 물이 담겨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다고 한다.’
2006년 영암문화원에서 발간한 ‘영암의 땅이름’에는 구정봉의 지명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월출산에서 세 번째 높은 봉우리이고, 월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20여명이 쉴 수있는 평평한 바위에 아홉 개의 웅덩이가 패여있고 이 웅덩이에 고인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하여 구정봉이라 부른다. 구정암(九井岩)에 오르려면 바위틈과 벼랑을 지나 3m를 올라가야 한다. 지금은 올라가는데 위험하지 않도록 길이 다듬어져 있으나 옛날에는 올라가는 데는 위험을 못 느끼지만 내려 올 때는 천길 벼랑때문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어느 부자인 이 진사라는 분이 무서워서 못내려 가겠으니 하인에게 집에 가서 땅문서를 가져오라 하였다 하여 진사바위라고도 전하여진다.(26p)’
여러 문헌과 설화를 통하여 전해오는 구정봉이 21세기를 맞아 새롭게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암인의 가슴에 숨 쉬는 구정봉이 홀연히 세계 최대의 큰바위얼굴로 드러나 세상에 꿈과 희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버거운 시대에 영암의 정기가 세상을 살리는 창구가 되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가.
아쉬운 것은 근래들어 구정봉을 ‘장군바위’로 홍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출산의 장군바위는 천황사 쪽의 장군봉 권역에 있다. 영암의 ‘영암군 마을유래지’와 ‘영암의 땅이름’에 나와있는 월출산 장군바위는 영암읍 용흥리에 있으며 ‘새실 남쪽에 있는 큰바위. 장군이 투구를 쓰고 있는 것 같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은 내용은 1983년 11월 영암군청에서 발간한 ‘영암관광’ 안내서와 전라남도에서 펴낸 ‘월출산 바위문화조사(광주민학회)1988’ 연구서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그 장군바위가 육형제 바위로 둔갑하고 구정봉이 장군바위가 되어 있다. 이런 혼동으로 군청 홍보영상에는 구정봉을 장군봉이라 표기해 놓았다. 영암인들이여, 구정봉을 주목하자. 구정봉은 영암의 얼굴이다. 장차 세계인의 발길을 월출산으로 이끌어 줄 우리들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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