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서호면 몽해리 출생 장천초등학교 졸업 전 목포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저승꽃은 승화다. 곰삭은 정화수다. 저승과 꽃, 너무나도 이질적인 둘이 만나 이승의 끝자락을 위로해 준다. 무서운 저승과 아름다운 꽃이 만나 석양의 황혼처럼 처연하다.
우리말에 저승꽃처럼 잘 다듬어진 말이 또 있을까. 내 어릴 적 외할머니 얼굴에 피던 저승꽃, 지금은 내 손등에 피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거무스름하게 피어나는 검버섯을 보면서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그때 난 외할머니가 무척 오래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흔이 조금 넘어 홀로된 외할머니가 일흔이 지나서도 집안 대소사를 관장할 때 그 곱던 얼굴에 피어나는 것은 분명 꽃이었다. 저승길을 미리 안내하러 찾아오는 손님은 아니었다.
난 가끔 죽음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두렵다. 칠흑 같은 죽음의 세계를 생각하면 무섭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된 분들과의 일을 반추하다 나 보다도 적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분들도 있었음을 깨닫고 내 나이 먹음에 깜짝깜짝 놀란다. 어린 나는 그 때 그분들의 초상 장례를 치르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결코 없기에 온 몸이 떨려온다.
금년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했다. 직장에 있을 때는 이런 저런 이유로 내가 직접 벌초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금년에는 구입한 예초기를 매고 형님과 함께 벌초를 했다. 6ㆍ25때 반란군에 죽임을 당한 큰어머니 묘소로 향하던 길에서 유난히도 곱게 벌초를 하고 있는 노인장과 마주쳤다. 곱게 자란 잔디를 마치 이발할 때 머리카락에 하얀 분을 발라 마무리를 하는 것처럼 천천히 정성스럽게 다듬고 있었다.
“누구 묘 벌초를 그렇게나 곱게 하시는 겝니까?” “내 묩니다”

노인장은 아무래도 객지에 나가 사는 자식 놈들이 조상묘소 돌보기를 게을리 할 것만 같아 작년 봄에 흩어진 묘를 한데모아 가족묘역을 조성하면서 아내와 자신의 묘까지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자기 묘를 벌초하게 되었다면서 웃었다. 어쩌면 자신이 조상의 묘를 돌보는 마지막 자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푸념도 했다. 깎은 잔디를 묘역 한 켠에 버리지 않고 갈퀴로 긁어모아 자루에 담아 트럭에 실었다. 노인장의 백발은 그가 다듬는 잔디 결만큼이나 고왔는데, 얼굴과 손등에는 그의 지나온 삶이 읽혀지는 저승꽃이 가득했다. 희로애락이 빠져나간 인생의 허물 같은 검버섯 이었지만 그러나 노인장의 저승꽃은 결코 추하지 않았고, 오히려 석양빛을 받아 정갈하기까지 했다.
“어르신 내년에 또 뵙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저승꽃은 세포가 죽어가는 데 미쳐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세포의 소멸보다 탄생이 많은 시절에는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있다. 소멸과 탄생이 같은 수준에 이르면 완숙미가 나타나고, 소멸이 더 많아지면서 곳곳에 흔적들이 남는데, 그것이 저승꽃이다.
저승꽃은 삼천 배 법당을 지키는 석등에 피어나는 석화 같은 꽃이다. 노년 빈곤은 미처 경험도 못했으면서 중년 상처가 인생 최대의 비극이라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 홀아비는 결코 피워낼 수 없는 훈장 같은 꽃이다. 세상사 겪을 만큼 경륜이 깊은 이에게 절로 베어나는 인격 같은 꽃이다. 저승꽃은 파고 만장한 인생의 화폭에 화룡점정 한 후 피어나는 낙관 같은 꽃이다.
미국시인 새뮤얼 울먼은 청춘이란 시에서 청춘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서 늙어가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내 머지않아 저승꽃 만발한 늙은이가 될지라도 청춘의 꽃이 피던 날 품었던 이상만은 결코 놓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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