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서호면 몽해리 출생 장천초등학교 졸업 전 목포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왜 같은 말도 하는 이에 따라 달리 들리는 것일까. 편견이 작용해 그러는 것일까? 편견이라면 고쳐야 되겠지만 그러나 쉽게 그리될 것 같지는 않다. 누가 누구에게 갖는 편견은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장학직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말을 접했다. 직접 대화를 통해서, 또는 강의나 글을 통해서 많은 교육가족들의 의지가 담긴 멘트를 접했다. 오래도록 남는 멘트는 그 까닭이 멘트 자체에서 연유하기보다는 그 것을 날리는 당사자의 지나온 삶과 그 멘트를 날린 대상과 장소에 있었다.
『일흔 두 살이 되니 세월이 시속 72킬로미터로 간다.』 민선 초대 오영대 교육감이 날린 멘트다. 97년 가을 날이라고 기억된다. 임기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월례조회 시 전 직원이 모인 가운데 대강당에서 한 말이다. 젊은 40대 때는 세월이 시속 40킬로미터로 더디 가더니 60대가 되니 세월이 빨라져 60킬로미터로 가더라며 당신 나이가 일흔 두 살이 되니 지금은 세월이 시속 72킬로미터로 간다고 했다. 전남교육의 총수에 올랐지만  연세가 높아감에 따라 절실감이 더해지는 인생의 덧없음을 세월의 속도로 표현했으리라.
『소규모 학교는 있어도 소규모 교육은 없습니다.』화순의 작은 학교 C교감이 연구보고회 때 많은 회원들을 향해 날린 멘트다. C교감은 근면성실하고 머리가 좋아 교대를 1등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화순의 산골에 자리한 작은 학교의 교감이 되어 온갖 정성을 다해 학교를 경영하고 연구 과제를 해결한 후 많은 회원들 앞에서 꽃잎을 날리듯 수줍게 말했다. C교감이 근무하는 학교의 요람은 격조가 있었으며, 교육과정 운영은 김장김치 마냥 깊이가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새우잠을 자면서도 고래 꿈을 꾸는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장학지도 차 섬 학교에 갔을 때, 소박한 교무실 뒷벽에 걸려있던 멘트다. 아이들은 도서의 가난을 이고 있었고 학교주변은 너무나 자연 친화적인나머지 오히려 황량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은 반짝거렸고 모든 것이 정 위치에서 온라인 상태에 놓여있었다. 학교의 구석구석에서 고래 꿈을 만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몸 튼튼 마음 튼튼 초등 교육 반세기, 학부모와 학생들은 진화하고 있는데, 학교의 구호는 그대로 멈추어 있다. 이제 학교의 교육구호도 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사의 큰 그릇을 나의 작은 그릇에 담으려다 깨어지는 아픔을 겪는다.』지역교육청 C장학사가 장학자료에 기고한 글 가운데 나온 멘트다. 그렇다. 소신을 품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전문직이라 하겠는가. 또 그 소신을 펼쳐보려 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깨어있다 하겠는가. 상사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다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기도 하고, 상사의 바위 같은 소신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주장을 접으면서 가슴을 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C장학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다른 이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손수건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학생 수는 22명이지만 할 일은 220가지네요.』장학사를 거쳐 장성의 작은 학교의 교감을 하다 영암의 초미니학교 미암초 교장으로 첫 발령을 받은 G교장이 2008년 초가을 아침 날린 멘트다. 부임 후 이틀이 지났을 때, 조심스럽게 위로차 건넨 전화에 G교장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필자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할 일이 태산 같다고. 이듬해 3월 1일 미암서와 통합했을 때 입학식을 겸한 미암서교생 맞이 행사를 온 정성을 다해 치렀음은 물론이다. 작은 갈등으로 오래도록 초미니학교로 존재하던 두 학교가 G교장으로 인해 화합하였고 이탈자 한 명 없는 합병을 이뤄냈다.
필자는 지금 교직을 퇴직하고 고향에서 지내고 있다. 같은 일을 40년이 넘도록 반복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망설여진다. 교육이란 무얼까? 더 정확히 표현해 교육활동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하찮게 생각되어지는 활동을 의미 있게 여기고 정성을 다해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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