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따라 길따라 - 미암면 미촌(美村)마을1920년대까지 면사무소 소재한 중심마을함평이씨, 전주최씨 42가구 80여명 거주

 

늦더위가 막바지 열기를 내뿜고 있지만 계절은 어느덧 가을의 정취를 풍겨낸다. 나날이 황금물결을 이뤄가는 들판의 오곡은 가을의 풍성함을 담아내고 있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들녘에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 땀 흘린 농부들이 수확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지난 1일 찾아간 곳은 미암면 미암리 미촌(美村)마을이다. 미촌마을은 미암면사무소에서 미암초등학교와 미암중학교를 지나 학산

400년이 넘은 해송인 마을의 당상목. 매년 정월보름이면 이 곳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를 지낸다.

면 광암마을 방면으로 길을 잡고 3㎞가량을 달리다보면 우측에 작은 사당이 나타나고 그 바로 앞에는 미촌마을 표지석이 나타난다. 표지석에 표시된 방향을 따라 좌측으로 들어가면 이 곳이 바로 미촌마을이다.
미촌(美村)마을은 원래 영암군 곤일시면이라 불리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미촌리, 노적리, 산정리, 신곡리, 흑암리, 항양리 등 7개리가 합쳐져 미촌의 미(美)와 흑암의 암(岩)자를 따서 미암(美岩)리라 했다고 한다. 1917년에는 면의 명칭도 이 곳의 이름을 따서 미암면으로 부르게 됐으며 미촌마을은 노적마을과 함께 미암리1구로 명명됐다.
미촌마을은 미암리에서 가장 컸던 마을로 골미, 곤미, 미산이라고도 불렸다. 백제시대에는 고미현(古彌懸), 신라 경덕왕때에는 곤미현(昆湄顯)이라 불리며 지역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었다.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대한제국 시절 광무2년(1898년)에 곤일시면으로 개칭돼 1928년까지 미촌마을이 면 소재지였다가 이후 면사무소는 춘동리로 옮겨가게 됐다. 그만큼 미촌마을은 미암면의 중심되는 마을이었던 셈이다.
표지석을 뒤로하고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미암보건진료소이다. 이는 지난 2011년 12월 새롭게 준공된 것으로 미촌마을 주변 3~4개마을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 마을에 보건진료소가 생기면서 농사일이 힘들때면 주민들은 이 곳 진료소내 물리치료실에서 안마의자를 비롯한 각종 시설을 활용해 노동의 피로를 해소하고 있다. 보건진료소 바로 옆에는 마을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는 마을회관과 마을 우산각과 당상목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당상목은 400년이 넘은 수령으로 마을주민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동시에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마을주민들도 해마다 음력 정월보름이 되면 나무앞에서 주민들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며 제를 지내고 있다. 당상목 바로 옆에 있는 마을 정자는 원래 마을회관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최근에 마을공사를 하면서 당상목 뒤로 자리를 옮겼다.
미촌마을은 함평 이씨와 전주 최씨가 자작일촌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조선말기까지만 하더라도 120호가 넘는 커다란 마을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현재는 42가구 80여명의 주민들이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 마을에는 함평 이씨와 관련된 전설하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전설은 조선말 동학농민운동이 한참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을에는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해서 전남지역 총책임자격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를 알게된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해 마을에 불을 질러 초토화시키기 위해 미촌마을 주변인 학산면 묵동 밤재 부근에 주둔하게 됐다. 오늘날로 말하면 군대의 소위정도로 장교급이었던 함평이씨의 상서(李商緖)라는 인물이 조정에서 파견한 군대의 수장과 만나 대화를 통해 군대를 물러가게 만들어 마을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마을주민들은 이상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마을 표지석 바로 옆에 사당을 짓고 해마다 3월 마지막주에 하루동안 일손을 멈추고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제를 지내며 마을잔치형태로 이어져내려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후에 이상서의 양자였던 이계석씨가 마을에 전답을 기증하면서 10여마지기의 전답을 마을주민들이 공동명의로 경작해 마련한 자금으로 제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또 미촌마을이 미암면의 중심마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마을주변 동서남북으로 사대문 터가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때까지만 하더라도 마을주변 4방향에 각각 대문이 있었으며 성으로 둘러쌓여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마을입구 주변에는 군사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훈련을 하던 장소였던 석뫼가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지만 석뫼라는 지명은 70대~80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암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농산물은 바로 고구마이다. 미암면은 황토흙이 많아 논보다는 밭농사를 주로 많이 하는 곳이지만 이 곳 미촌마을 주민들은 논이 많아 벼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미촌마을 주변에도 논보다 밭이 많았지만 마을에 영산호 물이 들어오면서 밭을 논으로 개간하면서 농토가 많아지게 됐다. 최근에 일부 주민들은 쌀값이 예전에 비해 크게 하락하면서 “밭으로 그냥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하며 후회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오기안 기자

■ 마을에서 만난 사람 - 마을이장 이정석씨

“단결력 하나만큼은 최고”

마을회관에 올라 마을주변 경관을 살피던 중 마을정자 바로 옆에서 이제 막 수확한 벼를 건조하는 작업에 한창이던 이정석(60) 마을이장을 만났다. 이 이장은 이 곳 미촌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마을토박이로 주민들을 대표해 마을발전을 위해 힘쓰는 이장역할을 하고 있다.
이 이장은 “미촌마을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전에는 미암면의 중심되는 마을로 한때 200명이 훌쩍 넘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며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이제는 70대이상 노인들만 거주하는 조용한 마을이 되버려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이 이장은 “계속 비가 오면서 일조량이 부족해 걱정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햇빛이 비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최근 올해 햅쌀 100여가마니를 수확해 판매하고 있는데 불과 1주일만에 7천원이 하락해 갈수록 농사를 짓기 힘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이 이장은 “이제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 되버렸지만 주민들의 단결력 하나 만큼은 그 어느 곳에 내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며 “해마다 정월보름과 3월에 제를 지낼때면 마을주민 모두가 함께 모여 음식도 장만하고 나눠먹으며 오순도순 정답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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