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서호면 몽해리 출생 장천초등학교 졸업 전 목포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초임교장 때 일이다. 매일 학교를 돌며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무엇을 콕찝어 생각한다기 보다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보냈다. 내가 지금 서있어야 하는데 앉아있는 것은 아닌지, 앉아있어야 하는 데 서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마음으로 하루해를 보냈다.
하루는 복도에 설치된 아이들의 신발장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신발 뒤축이 보이게 놓인 신발장은 흉하고 또 무질서했다. 신발장에 신발을 정리할 때는 앞부리가 보이도록 했다. 일부 선생님들께서 다른 의견을 제시했으나, 교과서 삽화를 보여드리며 지도해 줄것을 당부했다. 전 어린이는 앞부리가 보이도록 신발을 정리했다. 매일 아침 시업전이나 퇴근 무렵 학교를 한 바퀴 돌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신발장의 신발정리 상태를 보곤 했다. 신발이 가지런히 놓인 반은 어쩐지 학교생활이 충실하게 이뤄질 것만 같았고, 그 반대는 부실하게 이뤄질 것만 같았다. 어느 사이 내 스스로 아이들의 신발을 정리하는 것이 일과가 돼버렸다. 신발을 정리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너무나도 다양했다. 그 많은 신발 가운데 같은 신발이 몇켤레 되지 않았다. 어떤 신발은 한 켤레인데도 각기 색상이 다르기도 했다. 만지면 섬광이 일어나고 가만 놔두면 섬광이 사라지는 신발도 있었다. 짚새기를 연상시키는 신발, 성인구두를 축소시켜 놓은 듯한 신발, 등산화 같이 생긴 신발, 발레리나의 발싸개와 같은 신발, 그 옛날 갖바치의 명품 같은 신발이 신장마다 가득했다. 
유년시절, 나는 대청마루가 유난히도 높았던 일가 할아버지 댁을 자주 기웃거렸다. 그 할아버지 댁은 언제나 엄숙했으며 일하는 식구들도 정갈했다. 그러나 근엄한 할아버지의 얼굴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 대신 높은 대청마루 아래 섬돌 위에 놓인 깨끗한 하얀 고무신 한 켤레는 언제나 나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댁의 그 고요함과 그 정갈함은 그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할아버지 댁의 그 많은 식솔들과 그 많은 농사일을 그 하얀 고무신이 진두지휘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73년도에 교직을 시작했다. 보성군 벌교읍 장암리라는 곳에서 교직의 첫발을 내디뎠는데, 그 때 내가 근무하던 학교 아이들의 신발은 한결같이 검정 고무신이었다. 모두가 검정 고무신을 신고 그 핏빛만큼 빨간 새로 만든 운동장에서 뛰고 뛰었다. 이제 막지은 학교건물과 이제 막깎아 낸 운동장, 그리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타이아표 검정 고무신은 숙명같은 내 교직의 출발이었다. 그때 장암의 민초들은 모두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절대빈곤의 시절, 잃어버린 타이아표 고무신 한 짝은 온 학교를 시끄럽게 했고, 고무신 민원을 해결해주지 못하면 콩밭 메는 아낙이 적삼사이로 삐져나오는 젖무덤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임교사에게 들이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30여 년을 지나온 동안 너무나도 많이 변해있었다. 특히 1, 2학년의 신발은 정말이지 예뻤다. 형형색색인데다 모양이 신기할 정도로 다양하고 앙증맞았다. 내 어릴 적에는 발가락이 나온다거나 못신게 되었을 때서야 새로 샀는데, 아이들은 신제품이 나오면 새신발을 사기도 하는 것같았다.
한 번은 시업 전에 1학년 아이가 공책을 실내화 위에 올리고 있었다. 하도 이상하여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나 아이는 얼굴이 빨게진 채, 신발장을 잡고 오르내리기만 반복했다. 더욱 궁금해져 또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이 나와 다그쳐 물었을 때서야, 공책을 선물로 주고 싶은데 직접 주기는 부끄럽고, 또 책상위에 올려놓은 것보다는 학교에 오자마자 받게 하고 싶어서 아직 등교하지 않은 여자아이 실내화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이었다.
아,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한 것이다. 검정 고무신이 섬광나는 패션 운동화로 변했는데 아이라고 그대로 있겠는가!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다른 복도로 향했다. 더 정확히 말해 2학년 신발장 속으로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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