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2일(제164호)

▲ 본사 대표이사 발행인

가을걷이를 끝낸 농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전국 곳곳에서 쌀 수입 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집회가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거리고 나서 목청을 높이고 있는 부류들은 대부분 농민회 소속이라지만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들은 이미 모두가 거리투쟁에 합류하고 있으리라. 목을 조여오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당할 자 누가 있겠는가. 전남도도 농민들의 이같은 절박한 심정을 헤아려 한목소리를 냈다. 정부의 추곡수매제 폐지와 공공비축제 도입방침에 전남도가 강력한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정부가 최근 국무회의를 통해 심의 의결한 수매제 폐지와 공공비축제 도입, 수매가와 수매량 국회동의 폐지 등을 골자로 한 양곡 관리법 개정안은 본격적인 농정전환의 신호탄이다. 다시말해 농림부가 마련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지난 48년 정부 수립 이후 지속돼온 추곡 수매제를 사실상 폐지하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가 추곡 수매 실시 여부를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만큼 상황에 따라서는 당장 내년부터라도 추곡 수매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럴 경우 살아남을 농민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추곡 수매제는 그동안 우리 농정을 상징하는 핵심 제도였다. 정부가 수확기에 쌀을 의무적으로 사들여 쌀값을 안정시키고 춘궁기에 방출하는 추곡 수매제를 폐지한다면 우리 농민들은 풍랑을 만난 난파선 신세와 다를 게 없다. 지난 90년대 초반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진행될 당시 김영삼 정부는 쌀에 대한 관세화는 물론 최소시장 접근(MMA)방식의 수입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개방 절대 불가 방침을 세웠다. 식량안보 등 다른 이유도 있지만 쌀이 농가소득의 절대 비중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농민 반발 등 정치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던 정부도 결국에는 미국 등의 거센 압력에 밀려 10년간 쌀의 관세화를 유예받는 조건으로 MMA수입을 받아들였다. 10년째인 올해 우리 정부는 쌀시장 추가 개방 문제를 다룰 쌀 재협상에 나섰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UR 이후 농촌경제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높아져 2002년 쌀의 농업소득 비중은 46.9%, 농가소득 비중은 21.6%에 달한 것으로 당국은 집계하고 있다. 이는 정부의 단순 통계일뿐 많은 농가들은 쌀 소득이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공공비축제를 명분삼아 추곡수매제를 폐지하려는 것은 정치 논리에 더 이상 밀리다가는 도하개발어젠다(DDA)나 쌀 협상 등에 따른 추가 농산물 시장 개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농정 당국자들의 절박한 판단이 깔려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일정기간 현행 추곡 수매제를 그대로 유지, 쌀 생산농가를 보호하는 동시에 농민들이 정말 피부에 와닿는 대응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정부는 이제 말로만 농가소득 보전대책을 세우겠다고 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배마디 말보다 당장 농민들이 살아갈 방법이 필요하다. 올해도 벼농사가 풍작이라지만 들녘에 가득한 타닉과 한숨소리, 길거리 농민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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