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23일(제137호)

▲ 본사 대표이사 발행인

환호와 탄식, 침묵이 교차한 15일 밤이었다. 오후 6시 투표가 끝난 직후 방송사들이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전국이 술렁거렸다. “와! 당선이다”는 기쁨의 외침 뒤엔 무거운 탄식과 침묵이 다른 한편에 자리했다. “개표 결과를 지켜보자”는 신중함도 엿보였다. 일부 지역에선 출구조사와 다른 개표 결과가 나타나면서 역전 조짐을 보이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패색이 짙어진 후보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갔다. 16일 새벽까지 박빙의 접전이 이뤄진 지역후보들은 피 말리는 밤을 지내야만 했다. 4·15총선이 끝났다. 총선이 끝난 지금, 모든 이가 ‘먹고 살 것’을 외치고 있다.

정치권도 이에 질세라 ‘먹고 살 것’을 합창한다. 열린 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17대 국회가 열리면 여야가 ‘민생경제 살리는 것’부터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당의 모든 초점을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맞출 것”이라고 천명했다. 처음 제도권에 진입, 일약 제3당으로 급부상한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도 “땀 흘려 일하지만 늘 팍팍한 우리 서민들이 진정 행복해질 그날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그렇다. 우리 서민들은 지금 먹고사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네들이 당리당략에 빠져 싸움질만 해대고 있을 때 서민들은 생활고에 신음하고 있었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고 있다. 신용불량자는 무려 40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서민들은 빚에 쫓겨 목숨을 내던지고 있는 판에 수도권에선 부동산 투기가 여전히 극성을 부린다. 이른바 부동자금이라 일컫는 액수가 무려 400조에 이른단다. 투기꾼들이 휘젓고 다닐 때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 농민, 영세상인, 서민들은 항상 뒷전에 밀려나 있다.

민주노동당의 제도권 진입도 그런 민심을 대변한 것으로 해석된다. 보수 일색의 한국 정치사에 있어 제3공화국 이후 최초로 진보정당이 원내에 입성한 것에 대해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민심은 민노당에게 서민들을 위한 정책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제 17대 국회는 이런 민심을 거역해선 안된다. 등원하자마자 민생부터 챙기는 국회가 되어 국민들이 희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또 하나 바램이 있다. 정치개혁이다. ‘개혁’을 앞세운 열린 우리당이 원내1당으로 대약진한 것은 새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부패정치에 종지부를 찍으라는 준엄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신인들이 대거 당선된 것도 같은 의미다.

자민련의 몰락도 이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보스정치와 패거리 정치로 대변되는 ‘3金정치’는 더 이상 발붙이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해준 선거였다. 17대 국회가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 싸우지 말고 상생의 정치, 통합의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정치권이 그동안 대립과 갈등을 청산하고 국리민복을 우선하는 정치를 해야 하며, 부패·비리와 결별하고 권위주의적인 기득권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국민의 요구를 몰라서 상생의 정치를 못했거나 개혁을 미룬 것은 아닐 것이다. 항상 국민의 이익보다 당리당략이 먼저였고, 변화는 곧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애써 외면해온 것 뿐이다.

그러니 상생의 정치니 통합정치니 개혁이니 하는 말들은 사치스러운 어휘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권자들이 개혁을 다짐한 정당에 국회의석의 과반을 준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열린 우리당은 조만간 당내에 국회개혁추진단을 구성, 국회 전면 쇄신방안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 작업에 착수한다는 소식이다. 국회의원 면책특권 방지와 불체포특권 제한, 국민소환제도 도입, 감사원 국회이관 등 맑고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프로그램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주목받고 있다. 총선이 끝나 이제 불확실성의 안개가 걷혀가고 있다. 새로운 국회,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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