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정 구 군서면출신 법학박사 고용노동부고용센터장 전)호남대 법학과 강사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의 세월호 사고로 탑승자 476명 가운데 174명만 구조되고, 실종·사망자가 302명. 아직 피어 보지도 못한 꽃다운 어린 학생들의 목숨을 참혹하게 앗아갔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비통하고 참담하기 그지 없다.
 이웃의 고통과 불행에 무감각해진 사회라 하지만 이 가혹한 시간을 감당하기란 정말로 고통스럽다. 가슴이 먹먹하고, 자꾸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느 교사의 ‘눈물로 쓴 기도’에서 우리 어른들의 무책임과 무능을 그대로 보는 것만 같아 깊은 자괴감에 빠져든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장과 선원들은 무능력과 무책임으로 일관했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들의 지시에 따른 어린 학생들은 칠흑같이 어둡고, 깊은 바다 속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이 죄를 어떻하니
이 죄를 어떻하니
사랑한다고 말 잘 들으라고 가르쳐 놓고
사랑한다고 착해지라고 가르쳐 놓곤
그 말대로 했더니 이 지경이 되었구나
그 말 곧이 들었더니 일이 이리 되었구나
이제와 생각하니 후회막급이고
이제사 생각하니 잘못 가르쳤네
구해 준다 하고서 기다리라 하고서
바다에 가로막혀 애간장 녹이며
흐르는 물살만큼 빈 말만 시간만 흐른다.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마음에
모두가 운다. 한 없이 운다.

우리는 배나 비행기, 심지어 버스를 탈 때마다 그 운행을 책임진 사람들의 사명감과 능력에 우리의 안전을 맡기는 것이다. 그들이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사명감을 갖고 책임있게 행동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이런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고,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 중에 자신들만 아는 통로를 이용하여 먼저 빠져나갔다는 것은 그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서될 수 없다. 과연 ‘진인사(盡人事)’가 있었는지. ‘대천명(待天命)’ 하기 전에 운행책임자나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는가? 다하지 않은 것 때문에 가족들의 분노·절망·슬픔은 극에 달하고, 급기야 진도 앞바다의 통곡은 전국 방방곡곡에 국민들의 통곡소리로 변해 버린 것이다.
20세기 초 타이타닉호의 선장과 선원을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인가. 타이타닉호 선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배의 키를 움켜 쥐어 타이타닉호와 자신이 운명공동체임을 보여 주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에게는 배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일체감이나 애착도 없었고, 일사불란함도 없었다. 단지 무능과 무책임만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 사회의 신뢰가 하나씩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이처럼 한국사회의 신뢰가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그 동안의 급속한 성장지상주의가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절차와 과정은 무시해도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의식, 깨끗한 실패보다도 더러운 성공이 낫다는 의식이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버렸다. 이것을 해결하는 첫 걸음은 우리 모두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본 으로 돌아가는 것’은 건전한 시민정신을 되살리는 길이다. 남을 따돌리고 일등하는 것보다 ‘더불어 함께’ 하는 책임 있는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의식전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중요하다. 물론 이번 사고에서 직·간접적 책임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엄중하게 책임을 묻고, 시스템을 개혁하는 등 구태를 말끔히 씻어내는 일도 두 말할 것 없이 시급하다.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머리 숙이고, 또 숙여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송구할 따름이다. 잘못된 사회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막을 능력도 없는 무능함이 너무나 큰 죄일진대, 희생자들에게 명복을 빈다고 말하기에도 면목이 없다. 아~ 대한민국 2014. 4. 16. 진도 앞바다의 통곡소리를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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