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전과 함께하는 영암역사탐구] 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2부)

조 복 전 도포면 출생 전 법무부 연구관 경기대 겸임교수 역임
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

1950년 4월 25일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준비하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곧바로 북경 주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 대사 이주연으로부터 이주연 자신과 모택동과의 면담결과를 보고받았다.
이주연에 따르면, 모택동은 조선의 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조선과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 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김일성은 1949년 5월 14일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이며 조선인민군 정치국장인 김일에게 중국을 방문케 하였고, 그 결과를 스티코프 소련대사에게 설명하였다.
김일은 만주의 사실상 최고 권력자인 고강(高岡)과 총리 겸 외교부장인 주은래를 만났으며, 부주석 겸 국방부장과는 네 차례나 만났고, 모택동과는 한 차례 만났다.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하기위해 1950년 5월 13일에 외부에 전혀 알리지 않고 북경에 도착했다. 주요의제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모택동에게 무력통일의 의향을 전달하고, 스탈린과의 모스크바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며
둘째, 통상조약의 서명문제를 논의하는 것이고
셋째, 모스크바에서 논의 됐던 그 밖의 문제들에관해 그 결과를 모택동에 설명하고, 조선로동당과 중국공산당사이의 보다 긴밀한 접촉문제를 논의하는 것 등 이었다.

김일성은 5월 13일 저녁 늦게 모택동과 회담을 하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지난 4월 모스크바 회담 때 현재의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조선이 행동을 개시 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모택동과 협의를 거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음을 설명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그의 개인적인 설명을 요청했다. 모택동은 곧 스탈린으로부터 김일성의 설명이 맞는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스탈린의 확인을 받고나서 모택동은 5월 15일 김일성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모택동은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은 미국과 38도선 분할에 관해 합의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그와 같은 의무가 없으므로 북조선을 도와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뒤에 북조선이 남조선에 대한 작전을 시작하면 북조선을 충분히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조선이 현 시점에서 작전을 개시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두 나라사이에 공동의 관계가 됐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모택동은 5월 15일 김일성을 위해 만찬회를 열었다. 저녁식사 전 김일성은 소련대사의 정보에 따라 모택동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택동 동지와 우리와의 회담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모택동 동지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동지와 북한 간에 합의 한 해방계획을 전적으로 수용했다.”(스탈린에게 보내는 로시친 북경주재 러시아 대사의 전보, 1950년 5월 16일자)

스탈린은 5월 16일에 중국과 북한이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다는 생각을 지지했다. 스탈린은 소련대사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한반도에서 해방이라는 대사업이 성취되려면 조약이 즉시 조인 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북한 동지들의 성공을 보다 굳건히 하여 한반도 문제에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게 될 것이다. 위와 같은 모택동과 김일성과의 회담사실은 2000년을 전후해서 근년에야 알려졌다.

모택동은 왜 6.25한국전쟁에 개입했는가?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정권은 국민당정권과의 오랜 내전 끝에 성공은 했으나 여러 국내적인 문제가 산적해있기 때문에 국외 문제에 관여할 형편이 못되었다.
군의 준비부족과 장비의 열세는 물론이요, 경제 발전을 이룩하여 인민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하고,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보아 아직도 장개석의 국민당 잔존세력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내치에 치중해야했다. 그래서 중국민주주의 인민공화국(중공) 중앙위원회에서도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동의하고, 중공군을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의 호칭으로 참전한 것은
①  미국은 6.25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으며, 만약 미군이 개입한다면 미국을 한국전쟁에 묶어 둠으로써 자신들이 대만문제를 해결하는데 용이할 것이요 
② 만약 한반도 전체가 미국에게 점령되면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위신이 크게 추락할 것이고
③ 6.25한국전쟁에 개입하면 세계에 새로운 중국의 존재를 알리고,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며
④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한 상태에서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모택동은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2월 중순까지 거의 2개월 동안 소련에서 머물렀다. 그리하여 1950년 2월 14일에 스탈린과 중·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한반도에 관해서 자연스럽게 토론이 있었을 것으로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추정하고 있다.

■ 스탈린은 1950년 5월 3일 다음과 같은 말을 모택동에게 전하도록 북경주재 소련대사 로시친에게 지시했다.
 … 북한동지 일행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들과의 회담내용은 추후 귀하에게 연락하겠다.

■ 5월 14일, 스탈린은 앞서의 약속을 지켜 모택동에게 다음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모택동 동지에게] 북한 동지들과의 회담에서 동지 필리포프(스탈린)와 측근들은 국제 정세의 역학관계가 변했으므로 북한이 통일 작업에 착수하겠다는 제안에 동의했다. 이에 관해 추가적으로 부수되는 문제는 최종적으로는 중국과 북한의 동지들이 공동으로 결정해야한다. 중국동지가 이와 같은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새로운 심의가 있을 때까지 결정은 연기되어야 한다. 회담의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북한 동지들이 귀하에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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