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전과 함께하는 영암역사탐구] 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2부)

스탈린,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1950년 3월 30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다음 달 인 4월 25일까지 거의 한 달 동안을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이 기간에 세 번이나 스탈린과 회담을 하였다. 이때의 회담기록이 없어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인터뷰 등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유추하고 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의 변화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내방자들에게 말했다. 국제관계측면에서도 중국 공산당은 대륙에서 국민당과 전투할 필요성이 없어 졌기 때문에, 지금은 한반도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 중국군의 지원이 가능하다.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승리는 심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중국은 전 세계에서 아시아 혁명가들의 힘을 과시했고, 아시아의 반동세력들과 미국 및 서유럽의 연계가 약화되었음을 드러냈다. 미국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대륙에서 철수했고, 중국공산당과 싸우지 않았다.

이제 중국과 소련의 동맹조약 체결로 미국은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할 입장이 아니고 실제로도 그렇다. 소련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미국은 한반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워싱턴이 전쟁에 개입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확신이 설 때 까지 섣부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반도문제에서 북경이 조선해방 투쟁을 적극 지지하는 것이라고 스탈린은 표명했다. 이에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이 동맹을 맺은 이상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택동은 중국 혁명이 달성되는 데로 군대를 포함한 여러 수단으로 북한을 지원할 것을 여러 차례 약속했다고 밝혔다. 김일성은 그렇다고 한반도해방은 자신들 스스로 군사력을 달성할 것이며,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북한군의 전력의 양적 질적인 대폭 증강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상세한 공격계획도 불가결하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3단계에 걸친 작전을 제시했다. 먼저 38선 인근에 부대를 집결시킨다. 그리고 북한의 새로운 평화통일에 대한 발의(發議)를 시행한다. 서울은 즉각적인 거부의사와 함께 공격을 시도할 것이다. 옹진반도에 대한 북한의 발상은 칭찬할 수 있다. 그것은 누가 먼저 군사행동을 시작했는가에 대한 은폐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의 반격이 시작되면, 북한이 방위차원에서 전선의 폭을 넓히는 찬스가 생긴다. 전쟁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남한이 북한 영내까지 진입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이 전쟁에 참여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했다. 같은 아시아 정세에 정통한 중국의 모택동에게 의존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김일성은 38선에서의 공격이 남한 내의 빨치산 활동을 격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어, 남한정책에 반대하는 2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이 무력시위에 나설 것임을 스탈린에게 보장했다.
스탈린과 김일성 두 사람은 1950년 여름까지 조선인민군을 총동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북한군 총 참모부에 소련 고문을 파견하여 상세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토르쿠노프의 저, 구중서역원용)

 

스탈린은 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했는가?

스탈린은 1949년 말까지는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대하여 냉담한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1950년 1월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김일성의 줄기찬 남침계획에 동의하고, 4월 김일성과의 세 차례의 회담에서는 승인하는 차원을 넘어 군사장비의 지원약속 및 3단계전략까지 제시해주는 세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부정적인 입장에서 적극적인 입장으로 전환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국제환경의 변화와 소련의 국내 상황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모두 남북통일에 더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는 것이다. 국제환경으로는

①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1949년 1월 22일에 장개석국민당 정권을 중국대륙에서 대만으로 축출시키고, 1949년 10월 1일에는 북경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는 점이다. 
장개석은 조그만 섬 대만으로 쫓겨 갔으므로 이제 중공은 국내문제로 국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어 북한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미국의 동북아시아전략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곧, 미국은 일본으로 하여금 동북아시아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응하도록 하는 정책으로 궤도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②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1949년 6월 29일)한 상태에서, 미국이 1950년 1월 12일에 에치슨라인을 선포하였다는 점이다. 에치슨은 이 연설에서 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력은 제한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극동의 방위는 알류산열도, 일본, 오키나와 제도, 필리핀 제도를 잇는다고 규정했다. 남한은 미국의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김일성의 주장을 스탈린이 수용)

③ 스탈린이 말하는 국내 상황으로는, 1949년 9월 23일 소련의 원자탄개발성공이다. 소련이 원자탄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 날 경우 미국이 섣불리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소련의 원자탄 개발은 미국으로 하여금 미국의 세계전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것이다.

④ 스탈린이 모택동을 함정으로 유인하기 위한 것이다.  
스탈린은  국제정세가 유리하게 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김일성의 남침 계획안에 동의하면서도 중국을 어떻게 해서든지 6.25한국전쟁에 끌어들이려했다. 이것은 만일의 경우 예상과는 달리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해 오는 경우 북한을 도와야 할 모든 짐을 소련대신 중국이 지게 만들려는 스탈린의 계략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이다.

또, 한편으로 미국의 언론인 에드거 스노(Edgar Snow)가 주장하는 소모설(消耗說) 또는 함정설(陷穽說)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스노는 중국공산당간부들과 절친했던 미국의 언론인으로, 중국공산당의 역사적인 대 장정(長征)을 서방사회에 알린 인물이다.
스노의 주장에 의하면, 스탈린이 소련의 도움 없이 독자적인 힘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모택동이 유고스라비아의 티토처럼 탈소자주노선(脫蘇自主路線)을 걷게 되는 것이 아닌 가 두려워해서 미국과 싸움을 시켜 스스로 국력을 소모하게 하는 계략을 세운 것이 한국전쟁이었다고 스노는 보았다.
 
그런데 모택동이 그만 스탈린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결국 한반도에서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된 것이라고 스노는 주장했다. 6.25한국전쟁관련 러시아 외무부자료는 스노의 이설명이 모택동을 위한 변명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스탈린은 그가 북한의 지도자들이나 중국의 지도자들, 심지어는 평양과 북경에 주재하는 소련대사관들과 이 전쟁에 관해 교신할 때 자신의 이름대신 필리포프(Filippov) 또는 핀시(Fyn-Si)라는 가명을 썼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는 끝까지 스탈린 자신이 6.25한국전쟁에 개입했던 사실을 감추려 했다 는 것이다. (김학준의 한국전쟁에서 인용)

또 한편으로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조국통일과 남조선 인민의 계급해방”의지에 대한 감성적지지(感性的支持)도 작용했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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