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전과 함께하는 영암역사탐구] 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2부)

조 복 전 도포면 출생 전 법무부 연구관 경기대 겸임교수 역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

소련에서 중요한 고위급 정책결정의 기관인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김일성의 남침계획안을 공식으로 검토했다는 사실이 10여 년 전에 이미 밝혀졌는데, 이것은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태도 역시 신중한 것이었다. 이기관의 1949년 9월 24일자 결정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남조선에 대한 공격 개시는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2. 남조선에 대한 공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략 행위로 여겨질 것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전도발 의도로 평가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략문제를 국제연합총회에 제소하여 국제연합으로부터 미군의 남조선 파병에 대한 승인을  받아낼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할 수 있으며, 남조선에 대한 외군 점령의 장기화는 결국 조선통일의 지연으로 귀착될 것이다.
3. 김일성수상은 조선의 평화적 통일의 가능성을 너무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이런 결정은 스탈린에게 보고되었으며, 스탈린은 이것을 지침으로 스티코프 대사에게 내려 보냈다. 스티코프는 1949년 10월 4일에 스탈린의 지침을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김일성은 물론 박헌영도 이 지침을 소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이것은 스탈린의 지침에 대하여 김일성이 불만을 가졌음을 의미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와 같은 결정은 적중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스탈린과 모택동을 상대로 자신의 남침계획을 승인해주도록 요청했다. 
 
스티코프는 장문의 정세보고를 스탈린에게 보내 북한전력의 우세함과 남한의 북침 가능성을 강조하여 김일성의 논리를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북한의 평화 통일에 서울이 반대 불응하고 있어, 전쟁이 나면 남한곳곳에서 대규모의 반 이승만 시위가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북한의 승전능력, 남한의 북침 가능성, 미군철수로 인한 38선 협정의 실효 등을 들어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의 선제공격에는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 김일성은 1950년 1월 17일에 박헌영이 주최한 만찬에서 소련대사관의 두 사람의 참사관에게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완료되었으므로 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말했다. …… 김일성은 남조선인민이 자신을 신임하고 있으며 남조선인민은 통일을 바라고 또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같은 날 김일성은 스티코프 대사에게 3일 만에 끝낼 수 있는 옹진전략을 허락만 해 주면 며칠 안에 서울에 들어갈 수 있는데 왜 옹진반도의 공격을 허락하지 않는지 스탈린의 도움말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이처럼 김일성은 크레믈린이 북한의 계획을 수용할 것을 거듭 요청하며 압력을 가했다.
 
■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가 1950년 1월 30일에 평양의 스티코프 대사에게 타전되었다. …… 동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하지만, 그가 실행하고자하는 남한에 대한 이와 같은 대사업에는 대규모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시켜야한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도록 일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일성이 이문제로 나와의 회담을 바란다면, 나는 김일성을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회담준비를 갖추겠다. 이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소련이 북한을 도울 용의가 있음을 전하기 바란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동의하는 내용이다. 김일성은 이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는 것이다. 이 전문에는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는 남조선 문제에대해서 치밀한 준비를 해야 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지하기 바란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김학준180-186쪽 원용,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토르쿠노프, 구중서역 원용)

■ 1950년 1월 30일 스티코프는 김일성과 회담했다. 이 회담에 관해서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스탈린동지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다. 나는 1월 17일 만찬에서 나눴던 문제에 관한 스탈린 동지의 의견을 정확히 전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매우 만족해했다. 자신을 직접 만나 원조에 관한 논의를 갖자는 스탈린 동지의 의사는 김일성을 크게 감동시켰다. 김일성은 나에게 이 회견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획득할 가망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스탈린동지의 의사로 판단하건데 모든 준비가 끝났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일성은 매우만족해하며 곧 회견준비에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스탈린에게 보내는 스티코프의 전보, 1950년 1월 31일자)

■ 스탈린은 1950년 2월 2일 다음과 같은 강조사항을 대사 스티코프에게 추가로 지시했다.
…… 김일성과 내가 회담할 의제에 대해 극비에 부칠 것을 그에게 전달하기 바란다. 한 달 동안 다른 북한 지도자와 중국은 물론, 적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눈치 챌 수 없게 해야 한다. 모스크바에 채류중인 모택동과는 북한지원의 필요성과 한반도 통일의 필요성, 그리고 북한의 군사적 잠재력을 증강시켜 방위를 강화하는 점 등에 대해 의견교환이 있었다.

■ 김일성은 2월 4일 소련대사를 방문하여 북한의 보유사단을 10개 사단 이상으로 증설하기위한 추가편성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스티코프는 먼저 증설에 필요한 병력 및 물자의 유무를 검토하는 과정이 시행되어야하며, 조언을 구하기 전에 이문제에관한 북한 지도부의 논의가 이루어져야 함을 지적하였다.  김일성은 1951년으로 계획된 소련제 신무기 구매를 1년 앞당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 김일성은 새로이 증설될 3개 사단이 소련에서 구매한 신무기들로 무장하기를 바라고 있었다.(모스크바로 보내는 스티코프의 전보 1950년2월 4일자, 구중서역 재인용)

■ 스탈린은 평양의 의뢰에 대한 입장을 스티코프 대사에게 1950년 2월 9일 전보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김일성을 만나 다음사항을 전달할 것, …… 추가적인 3개 사단의 증설에 착수하라. 1951년으로 예정된 신용공여(信用供與)는 1950년으로 앞당겨질 것이다. 이는 김일성이 요청한 바였다.(스티코프에게 보내는 중앙의 전보1950년2월 9일자, 소련외무성 제2429호 암호전보, 폰드45 구중서역 재인용)

스티코프는 위 전문내용을 다음날 김일성을 방문하여 소련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했으며 김일성은 매우 기뻐하며 스탈린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 스티코프는 1950년 3월 21일 모스크바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귀하의 지시대로 3월 20일 박헌영이 동석한 가운데 김일성과 회담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스탈린동지의 전보를 전달했다. 김일성은 4월초에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들은 1946년 회담과 같이 비공식적인 회담을 원하고 있다. 김일성은 회담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이며, 다음과 같은 의제를 상정하고 싶다고 했다.
① 남북통일의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
② 북한의 경제발전의 전망에 대해서
③ 가능하다면 약간의 당내문제에 대해서

■ 스티코프는 1950년 3월 23일 김일성이 스탈린과 논의하고자하는 의제에 관한 상세한 검토 자료를 제출하고, 다음날인 3월 24일에 아래와 같은 긴급전문을 소련에 보냈다.
…… 김일성을 방문하여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환영하는데 동의 했다는 요지를 전달했다. 김일성은 3월 20일경 모스크바를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일성과 박헌영을 위한 특별기가 준비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검토해주기 바란다. 특별기는 3월 29일 쯤 도착하면 될 것이다. 특별기의 여건이 안 된다면 청진에서 불라디보스토크까지 해군 수송선을 이용하면 된다. 불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열차를 이용하고, 이 열차는 특별차량이어야 한다.
김일성은 지난번 회담에서 통역을 맡았던 문일과 역시 1949년 때도 대동한  소진순을 부관으로 참석시킬 의향이다.(모스크바로 보내는 스티코프의 전보 1950년 3월24일자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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