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전과 함께하는 영암역사탐구
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2부)

조 복 전 도포면 출생 전 법무부 연구관 경기대 겸임교수 역임
스탈린,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지령

스탈린은 레닌이 1924년 사망하자 정 치적 경쟁자였던 트로츠키 등을 차례로 제거하고 전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스라브계가 아닌 소수민족인 구루지아계 출신으로 제정 러시아의 영토 확장에 대한 숙원을 달성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스탈린은 1879년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수민족출신이라는 컴플랙스를 호도(糊塗)하기 위하여 소수민족을 대단히 핍박하고, 195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많은 국민을 학살하였다. 1928년부터 1930년에 걸쳐 농촌을 사회주의 집단농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수백만의 농민들을 학살하였다.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다. 1937년 연해주지방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을 중앙아세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갔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동방에서의 영토 확장의 주요 목표는 만주로 알려진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스탈린의 주요관심은 만주의 전략적 요지와 항구들이었다.
그의 동북아시아에서 관심은 만주였으므로 한반도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이었다.

이처럼 스탈린이 아직 한반도에 대한 확고한 정책을 수립하지 않고 있던 차에 미국 측이 38선을 제안해오자 그는 “트루만의 제안을 공평한 것으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에서 9월초까지만 해도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은 유동적이었다.

그러나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소련이 점령한 북한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북한지역에 단독 정부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한국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된지 37일 만에 내려진 이 지령은 해방 후 북한의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해방 후 한반도에서 미·소관계의 진전과 더불어 한국현대사 전반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 지령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 시키는 것이었고, 남북의 재통합, 즉 민족의 재통일을 위한 모든 논쟁과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제2권, 이정식, 책 세상, 13-26쪽 원용)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설립, 이는 외형적으로는 한반도에 단독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이를 통하여 남북한 국민이 원하는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미국과 소련은 자기의 국가정책방향만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세월만 가면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면서 분단의 고착화로 가고 있었다. 이는 6.25한국전쟁으로 연결되는 길목이었다.

 

6·25한국전쟁, 누가 일으켰는가?

누가 6.25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 남한에서는 그것도 질문이냐고 하거나, 또, 어떤 사람은 그 질문자를 사상적으로 의심도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6.25 한국전쟁에 관해서 주로 외국학자를 중심으로 논쟁이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에 대한 논점은 세 가지방향이다. 즉, 전쟁을 일으킨 자는 누구인가,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전쟁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의 세 가지였다.
그러면 전쟁을 일으킨 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주요 학설을 보고자한다.

첫째는,  북한의 남침설이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끈질긴 요청에 따라 스탈린이 승인하고 모택동이 이에 동의해서 남한에 대한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남침설(南侵說)이다. 이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자국의 팽창주의 정책에 따라 유럽에서 동남아시아로, 동북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북한을 사주하여 남한을 침공케 했다는 주장이다. 남침설은 한국과 미국 정부의 공식견해를 수용하고 지지하는 견해이다. 이는 정통주의 학설로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온 정설이다.

둘째는, 남한의 북침설이다.
 이설은 한국과 미국정부가 공모해서 북한을 먼저 침공했다는 주장으로  비정통주의 학설이라 한다. 북침설은 북한이외의 공산권에서도 불합리하고 근거 없는 주장으로 배척되고 있다.
셋째는, 북한의 남침 유도설이다.
이설은 정통주의 학설에 대한 수정주의 학설로, 한국과 미국이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을 침공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설은 다음 장에서 서술하겠지만, 1950년을 전후하여 미국의 이해할 수 없는 갈팡질팡한 한반도정책에서 이 학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위와 같은  여러 주의주장에 대하여 6.25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로 국제적 권위가 있는 박명림 교수는 “ 지금까지 우리는 남침이냐 북침이냐하는,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논란을 수십 년 간 거듭해왔다”고 말하고 “한국전쟁은 분명히 통일을 위한 세계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지지와 원조를 받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선택의 결과” 라고 말하여 남침설을 확인하였다.(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토르쿠노프, 구중서역   11-26쪽 참조)

 

2.김일성의 남침준비와 스탈린의 승인, 모택동의 지원

한반도에서 6.25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된 두 번째 원인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이 승인하고, 모택동이 이를 지원하기로 합의 한 두 공산지도자들의 공모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이후 남한과 북한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정 3년간은 각기 그들의 정책에 부합하는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기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간을 거쳐 남북한은 각기 친미적. 친소적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북한은 무력에 의한 남조선인민의 해방과 남북통일이라는 대남정책을 유지하면서 남한에 평화통일을 제안하였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정책을 유지해 왔으나 미국의 견제를 받아 그의 북진통일정책은 “공갈 때리기” 통일정책으로  비쳐졌다. 

그런데 북한의 남한에 대한 평화통일제안은 군사적 공격을 위한 명분축적이요, 위장책략이었다. 평화통일 제의 이면에서 김일성은 치밀하게 남침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한내부로는 무력도발을 위한 군사무기를 개발하고 확장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중국을 수차례 방문하여 남침을 위한 공조체제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하여 시인(詩人) 고은(高銀)은 그의 시집 만인보(萬人譜)에서 북한의 전쟁준비와 남한의 “공갈 때리기 북진통일론”을  “이재긍 중좌”라는 시제(詩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북 전쟁 준비 / 최소한 4년 전부터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1948년 2월 / 인민군이 창설되었으나 / 훨씬 이전부터 / 경비대 / 보안여단의 병력이 편성되었다 /
이것도 모르고 남의 신성모는 큰소리만 쳤다 /
점심은 평양가서 먹고 / 저녁은 신의주에 가서 먹는다고 /
38경비대는 T-34 탱크보유의 전투력을 과시했다 / 소련군사고문 중국 팔로군 간부가 전투훈련을 지도했다 / 따발총 수류탄 등 /
개인화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

38경비대 제3여단 제7대대장 이재긍 중좌는 / 북의 인민군 남침직전 /
38선 이남의 남쪽 국방경비대 실정을 정탐하고 있었다 /
첩보작전 정밀했다 / 그는 남쪽을 비웃었다 / 국방경비대 장성은 술독과 돈독에 빠졌고 / 국방경비대 장교는 여색에 빠졌다 / 때가 오고 있다 /

 그러나 그는 그가 비웃던 남쪽에 넘어오는 운명 이었다 /

고은이 그의 시에서 묘사한 것처럼, 김일성은 대외적으로는 소련 및 중국과 긴밀하게 남침 공조체제를 유지했고, 대내적으로는 군사훈련과 병행하여 군수물자를 생산하면서, 정탐꾼을 남한에 밀파하여 군비관련 상황 및 정치와 사회상을 파악했다.

 김일성은 남한을 적화 통일한다는 계획을 1949년 1월부터 추진하였다.
그는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의 완정과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궐기하자.”라는 제목의 연설문에서 국토완정론(國土完整論)을 제시했다. 김일성은 이때국토완정을 위해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를 선도하고 지원하는 튼튼한 기지가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고(북한기지론), 남한의 좌익 공산세력과 연대한다는 전략을 마련하여(통일전선전략),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남로당 중심의 대남 게릴라전(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이로써 남한도처에서 시위와 총파업 무장반란 등의 소요사태가 잇따라 일어났다. 1946년 10월 대구 폭동과 1948년 10월의 군인들의 여수 순천 반란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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