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전과 함께하는 영암역사탐구] 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2부)

조 복 전 도포면 출생 전 법무부 연구관 경기대 겸임교수 역임
<지난호에 이어>  소련의 제25군은 작전을 개시한 8월 9일부터 청진 원산 나진 등을 점령해나갔으며 8월24일 평양에 입성하였다. 소련은 8월 28일 까지 총 병력12만 5천명을 북한 전역에 배치시켰으며, 도·시·군에 점령군 지역사령부 설치를 끝냈다. 8월 25일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를 구축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다. ……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김삼웅, 사료로 보는 20세기 한국사, 가람기획, 178-180쪽 재인용)

이 화려한 수사에는 다분히 과장과 계략이 있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천도 있었다. 소련군은 각 지역에서 일본인 행정관리를 쫓아내고 인민위원회에게 행정 및 치안유지를 맡겼으며, 시 군 읍 면단위 인민위원회를 통합하기위하여 도(道) 단위 인민위원회 지부를 결성하려는 조선인 지도자를 지지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사가 온건한 민족주의자이면서, 기독교 교육자인 조만식이요, 조선공산당을 이끈 현준혁이다. 그리하여 9월 말까지는 북한 전 지역에서 인민정치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조선의 정치 및 경제생활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일본인 소유재산과 식민지 및 봉건적 법률을 제거하기 위해 20개 조항의 정강을 발표하였다. 이 정강에 따라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근본적인 개혁을 통한 북조선사회의 재구조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3월 5일 토지개혁령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하여 4만 4천명의 지주들로부터 무상으로 몰수한 토지를 북한전체 농촌인구의 70%에게 무상으로 재분배되었다.(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 대편 제1권에서 원용)

북한의 토지개혁은, 남한이 정부가 수립된 후, 농지를 정부가 유상으로 매입하여 유상으로 분배하였던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남한의 토지개혁정책과 대비됨을 알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빨리 단행됨으로써 지주들이 남한으로 대거 남하였고,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었으나, 남한에서는 정부수립이후에야 토지개혁이 단행됨으로써, 그 이전 까지는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는 등으로 사회가 불안정하였고, 좌익세력이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스탈린의 김일성낙점과 소련군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경계와 경멸

소련군은 8월 26일부터 38도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하면서 남과 북을 잇는 경의선 철도, 전화통신, 사람과 물자의 왕래 등 모든 걸 다 끊었다.
물론 소련군은 비공식적으로는 이후 한동안 북한사람들의 남한으로의 이동만큼은 모른 척 내버려두었다.

8월 하순의 어느 날 , 소련군 극동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에게 스탈린으로부터 북한을 소련의 뜻에 맞게 이끌어 갈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해 보고하라는 긴급지시가 내려왔다. 바실레프스키에는 극동군 산하 88특별여단 소속의 대위 김일성을 추천하였으며, 9월 초순 스탈린은 김일성을 면접하고서 합격 판정을 내렸다.(김학준의 북한50년사: 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역사, 85-86쪽 재인용) 

김학준은 그의 저서 <북한50년사>에서 북한 점령을 맡은 제25군은 “중앙아시아의 감옥에서 풀어내 징집한 죄수 출신 사병들이 많았고, 그래서 어떤 통계를 보면 약 30%가 머리를 빡빡 깎인 채 끌려온 사병들 이었다”고 말했다.
“보급품도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군용열차를 타고 온 그들이 평양역에 내렸을 때 그들의 모습은 거지처럼 보였다. 군복은 낡았고 군화는 헤어졌으며, 땀과 때에 절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훌렙이라는 소련의 검은 빵을 들고 내렸다. 그것은 그들의 식량이면서 베게였다. 땅바닥에 앉을 때에도 그것을 깔개로 썼으며, 그렇게 쓴 것을 식사 때가 되면 식빵으로 먹었다. 해방군이 온다고 환영 나갔던 평양시민들은 소련군의 남루하고 무식한 분위기에 너무 놀랐다. 그래도 흉악무도한 나치군대와 야만적인 일본군대를 무찌르기 위해 고생했구나 하고 동정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동정심은 곧 경계심과 경멸로 변했다. 소련군은 “우리들의 신경으로는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추잡하고 우악스러웠다.”고 양영문은 그의 저서 <소련군의 만행>에서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이북에서 월남한 주민이 경험한 소련군의 인상 중에는 소박하고 친절하고 다정스러웠다는 반대의 증언들도 있기는 하지만, 남북한을 막론하고 소련군이든 미군이든 외국군인 이상 그들의 부정적인 특성이 널리 유포되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련군은 북한 주민의 공포심과 증오심을 유발하기까지 했다. “거지 떼 모양의 소련 점령군 일부는 강도와 강간의 길에 나섰다. 아무것이나 빼앗았다.” 며 “그들이 특히 시계를 좋아해, 평양거리에는 팔에 시계를 네댓 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 병사들이 수두룩했다.”고 김학준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기술하였다. 따발총을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위압감을 주는가하면, 대낮에 여자들을 강간하기도하였다.

그래서 평양주민들은 집 대문에 대야를 걸어놓고 근처에 소련 병정이 나타났다하면 대야를 두들겨 이웃들에게 알려 주면서 공동대처했다.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병사들의 행패를 모르는 척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병사 개인 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점령군 조직의 차원에서 북한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의 손실을 메운다는 취지에서 북한에서 공장을 비롯해 산업시설물들을 마구 뜯어갔다.

부르스 커밍스도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인과 한인들에게 강간과 약탈을 포함한 파괴행위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아주 광범위했으며 적과 그들의 한국인 동맹자들에 대한 보복의 범위를 벗어났던 듯하다”고 기술하였다.
 

<작은 맺음>

6.25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면서 국가기밀문서가 기밀문서에서 해제되어 공개되고,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했던 고르바초프가 6.25한국전쟁과 관련한 기밀문서들을 제공하였으며, 러시아의 역사학자 A·V 토루쿠노프가 쓴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와 같은 저서가 출간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경우에도 국가기밀문서가 해제되고, 워싱턴 대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 같은 학자들이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연구서를 출간하는 등으로 6.25한국전쟁의 기원들에 대한 새로운 주의주장과 정보들이 쏟아지게 되었다. 
이로써,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던 기밀문건이 공개되었다. 또, 스탈린과 김일성의 면담 대화록, 스탈린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 간에 오고갔던 전문까지도 공개되었다.
이처럼 많은 기밀사항들이 공개됨으로써 한국전쟁의 기원들에 관해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발발의 원인(遠因)인 한반도의 분단과 고착화에 관해서 국내학자들에서는 깊이 다루고 있으나, 국외학자들은 이를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듯하다. 
6.25한국전쟁의 원초적(原初的) 발단은 미국이 주도한 미소의 38도선을 기점으로 한 남북한의 분할 점령정책이었다. 우리 한반도만이 식민지국가로써  제2차 세계대전 후 점령군이 진주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은 우리에게 어떠한 관계인가라는 물음을 재차 던지면서, 국제관계는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사실은, 적대관계였던 한국과 중국이 2013년 6월 27일부터 4일 동안 진행되었던 한·중 정상회담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는 곧 우리나라의 경제적 성장을 배경으로 한 국제적 위상을 실감하면서,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만’이 적용된다는 스펜서(Spencer)가 주창했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이 아직도 퇴색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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