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전과 함께하는 영암역사탐구] 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2부)

조 복 전 도포면 출생 전 법무부 연구관 경기대 겸임교수 역임
영암의 6.25참상은 6.25한국전쟁 참상의 축소판이요, 그 중에서도 가장 혹심했던 상처이다. 6.25가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깊은 상처가 있을 수가 없었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한반도의 차원에서 6.25발발의 제 요인을 살펴 보고자한다.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본 한반도
6.25한국전쟁은 세계 제2차 대전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세계 체제 전체를 뒤흔든 전쟁으로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만도 남한에는 16개국(사실상 일본이 참여한 것을 합하면 17개국)에 이르며, 북한에는 중국과 소련이 참여했다.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 150만 명이 넘는 외국의 군대가 들어와 싸웠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에서 4백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한반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전쟁인 6.25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한반도는 작다.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거대한 나라의 영토에 비하면 한 개의 주(州)나 성(省)의 크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 비교하여도 한반도는 영토도 작고 인구도 적다. 한국인 스스로 작은 섬나라라고 비웃는 일본의 땅덩어리나 인구면에서도 이의 절반 조금 넘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부존자원도 거의 없고, 시장규모도 작은 편이다. 겨우 2012년에야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에 인구 5천만이 되어 세계의  2050대열에 끼였다고 우리국민들이 흥분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우리의 역사를 보면 세계적 관심을 끌 아무런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
『고대로 올라가면 고구려가 동북아시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한 적이 있으나, 그것이 곧 패권국가로의 세계의 제국으로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박태균 저 한국전쟁 원용)

그렇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동북아시아 전체가 휘청거렸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이해관계와 결부된 것은, 우리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한반도는 중국과 러시아 등 대륙세력과 일본과 미국 등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대로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다. 그리하여 열강은 한반도를 자신의 독점적 지배체제에 두어 한반도에  대한 다른 경쟁국들의 영향력을 배제시키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한반도를 다른 경쟁국들과 더불어 분할하여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부분적으로나마 확보하고자하였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여러 차례 있었다.
6-7세기 수나라는 동북아시아에서 확고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무리한 침략으로 수나라는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1592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은 7년간의 긴 전쟁으로 일본에서는 도요도미   히데요시가가 멸망하고 도구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등장했으며,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수립되었다.
1894년에 일어났던 청일전쟁은 한반도에 대한 패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간에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중국은 동북아시에서의 패권국가가 아님을 확인시켜주웠다. 이후 청나라는 신해혁명과 5.4운동을 거치면서 몰락하였다.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싼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1905년 제1차 혁명을 겪었고, 1917년에는 세계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여세로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였고, 그 후 1931년 만주사변을,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다시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이렇듯 한반도를 무대로 하여 일어난 사건들은 그 파장이 동아시아 전체로, 때로는 러시아와 태평양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6.25 한국전쟁도 그 발발원인이 지정학적 특수성에 있다.  6.25한국전쟁의 보다 특징적인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대결을 피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분할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삼기위하여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의 분단은 6.25한국전쟁 발발의 원인으로써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현실화 되었는가!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단과 점령 - 병(病)주고 약(藥)주는 나라 미국

6.25발발의 원초적 요인은 한반도의 분단에 있다.
“국제관계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은 우리 한반도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현재까지 고착되어있는 한반도분단의 가장 큰 책임은 미국에 있다.

미국은 과연 우리 한국에게 어떤 관계였을까?
미국은 6.25 한국전쟁당시에 공산주의로 부터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미군을 한국에 50여만명을 파병, 이중에서 5만4천여명이 죽었다. 이를 계기로 지금은 한미관계를 ‘맹방 또는 혈맹관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6.25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한미관계는 긍정적인 관계라기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더 강하다. 
세계 제2차 대전이후 미국에게 한국은 전범국가인 일본을 지키기 위한 도구였을 뿐인가 하는 의구심이 많다. 40년 전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테프트를 일본으로 보내 일본 수상 카쓰라와 이른바 카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주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지배를 인정했다. 강대국들끼리 나누어 먹기였다.
그런가하면, 1875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기위한 첫 조치로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했을 때도 미국은 일본을 후원하였다. 미국은 1853년 일본을 강제 개항하기위하여 페리제독이 이끄는 5척의 군함과 대포를 앞세워 일본을 굴복시켰다.  이 사례를 테일러가 “페리제독의 원정소사”라 기술하여 훗날 주한 일본공사가 된 이노우에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0년이 지난 이제 미국은 전후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기위한 방위선 구축 차원에서 다시 한반도를 놓고 소련과 흥정을 벌이기로 한건지도 모른다.』 (동지 강준만)

해방 후 한반도의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한반도의 남북분단이었고,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초적인 문제였다.
미국이 이 분단을 주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말에 닥아 오면서 연합국수뇌들은 전후 패전국에 대한 처리문제며 세계질서의 재편성 등을 가지고 회동하면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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