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전과 함께하는 영암역사탐구] 영암의 6·25 참상,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2부)

조 복 전 도포면 출생 전 법무부 연구관 경기대 겸임교수 역임
국제신보(부산일보의 전신, 필자 주)는 1950년 12월 25일자에서 “적 사살 327명”이라는 제하에 “영암지구 아 해병대 전과 다대” 라는 부제로 영암에서의 해병대의 교전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이 기사를 전재하면,
“금 23일 목포에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아 해병대 모 부대는 거반 15일부터 1주일 동안 영암지구 월출산, 국사봉 ‘잔비 소탕’에 출동하여 이와 맹렬한 교전 끝에 다음과 같은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적 사살 327명, 노획물 다수 - 아방피해 전사3명, 부상1명”이라고 보도하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290쪽)

6.25사변 피살자 명부 : 영암 7,175명

이 명부의 정식 명칭은 <6.25사변 피살자 명부>로 작성주체는 정부 공보처 통계국이며, 작성일은 1952년 3월 31일 현재이다. 이번에 발견한 피살자 명부는 국립중앙도서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을 월간조선이 찾아내어 간행하였고, 이를 서울 남산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필자가 입수하였다. 이 명부에 등재된 영암에서 피살된 인원은 7,175명으로 다른 자료보다는 상당히 신뢰성은 있으나 몇몇의 피살자는 명단이 중복되어있고, 6.25전이나 6.25전쟁 중에 유격대원(빨치산)으로 활동하다 피살된 여러 사람들의 명단은 등재되어있지 않다.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진실화해위원회 : 2,818명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집단희생 관련 피해자현황조사 용역사업결과보고서 2007>의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전쟁당시 영암지역에서 군경 및 적대세력 등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 2,818명이고, 이 중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 수는 1,099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제6차보고서 618쪽)  ※ 진실화해 위원회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말한다.

물적 피해(物的 被害)

다음으로는, 물적 손실이다. 영암에서 인적 손실 다음으로 물적 손실을 들 수 있다. 이에 관해서도 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행정기관은 물론 학교 병원 교회 사찰 및 민가를 비롯하여 공장 도로 교량 등이 주로 적대세력의 방화에 의하여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영암군청 청사가 1949년 10월 20일 새벽3시 불에 탄 것을 비롯해서 11개 읍 면사무소와 지서가 소실되어 버렸고, 영암중고등학교를 비롯해서 각 면단위에 있는 초등학교가 불에 타버렸다. 그래서 군경수복 후 수년 동안 학생들은 개인의 가정집이나 제각 등에서 공부를 해야 했고, 학교 가건물이 세워진 후에는 땅바닥에 짚 가마니를 깔고 공부를 하였다. 그런가하면 도갑사와 교회 등 종교건물이 불에 탔으며, 도로 및 교량 등이 파괴되었고, 황천주조장 등 공장도, 민가도 불에 탔다. 구림에 있는 회사정도 1950년 10월 3일 소실된 것을 1980년대에 와서야 중건되었다.

정신적 피해(精神的 被害)

인적 물적 피해에 못지않게 정신적 피해도 컸다. 부모를 잃은 어린 자식들의 울부짖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피 맺힌 절규, 지아비를 잃은 아녀자의 넋 나간 모습은 충격을 넘어 저주와 절망으로 나타났고, 군내에는 언제 또다시 엄습해 올 줄 모르는 살인과 방화 때문에 살아남은 자들도 불안과 공포가 팽배했고, 이웃과 이웃끼리도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경계심리가 군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운동과 관련하여 수차례감옥생활을 했던 영암사회의 많은 지도층인사들이 미군정하에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흑백분리정책에 의하여 좌익으로, 6.25전후에는 적대세력으로  분리됨으로써 영암사회는 한동안 이념적 갈등과 대립이 심하게 혼재하게 되었다.   
   

<작은 맺음>
영암의 6.25 참상의 진실은 규명할 수 없는 것일까?
앞에서 본 봐와 같이 영암에서의 인명피해는 자료에 따라 너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12,044명이며, 여기에 국제신보가 보도한 327명을 합산하면, 1950년 12월 25일까지 영암에서의 발생한 희생자는 12,371명인 셈이다.
그러나 <6.25피살자명부>를 보면, 1952년 2월까지의 영암의 피살자는 7,175명으로 앞에서 제시한 자료와는 희생자의 희생기준 및 희생자의 집계 시점 등으로 보아 상충된 점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이 진실화해위의 용역을 받아 조사한 바에 의하면  2,818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 세 자료는 희생자의 통계수치에서 너무 편차가 심하여 참고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신뢰하기는 어렵게 생각된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라도 영암인들에 의하여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호에 2편 6.25발발의 국내외적 요인(要因)을 구명(究明)하고, 영암의 지정학적 특수성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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