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성씨기행 <12> - 김해김씨편
시조는 금관가야 김수로왕… 사군파, 도사공파 등 분포

구고사 서호면 화송리에 있는 구고사는 전남 지방기념물 제 49호로, 보물 제 1305호인 김완 장군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김해김씨는 본래 가락김씨
김(金)씨는 문헌에 623본까지 나타나나 2000년 조사에서는 350여 본이 현존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그 중에서 시조가 뚜렷한 것은 100본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 최대 성관(姓貫)인 김해김씨에는 세 계통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김해김씨라 하면 가야계(김수로왕계)를 말하며, 그외 사성 김해김씨가 있고, 신라계(김알지계) 김해김씨가 있다. 그 중에서 이번에는 가야계 김씨인 김수로왕의 후손 김해김씨에 대해서 알아본다.
잘 알려진대로 김해김씨의 시조는 금관가야의 시조왕 김수로로, 김해김씨는 본래 가락김씨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김해김씨로 개칭하였다.
김수로의 탄생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화가 있다. 많이 알려진 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로, 서기 42년에 금빛상자 속의 여섯 황금알 중에서 맏이로 태어났다는 설화이며, 또 하나는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쓴 ‘석이정전’에 나오는 설화로, 가야산 산신(女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의 감응을 받아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가야왕 뇌질청예(靑裔, 김수로)를 낳았다는 설화이다. 그래서 김수로는 원래 뇌씨 혹은 뇌질씨였을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고 2010년의 MBC 주말드라마 ‘철의 제왕 김수로’에서는 김수로의 생부모를 김융(중국 김씨의 시조인 한나라 제후 김일제의 후손 혹은 방계)과 정견모주(정견모주 역시 북쪽에서 온 유이민으로 설정)로 설정했었다. 우리나라 김씨의 연원에 대한 여러 설 중에는, 중국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고, 신라계 김씨(경주김씨 등)가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가락국 김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는데 장자인 태자 거등(居登)은 김씨 성을 이어 받으며 가야의 2대 왕이 되었고 둘째,셋째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7왕자는 출가 정진 성불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
김해김씨 외에 양천·태인·시산·하양·이언·김해허씨 및 인천·양산이씨 등도 허황옥의 후손이며, 진주김씨 원술계 등 몇몇 성관도 김수로, 허황옥의 후손이다.
김해김씨(가야계 김씨)는 신라계 김씨(경주김씨 등)와 함께 삼국통일 전후의 신라를 이끌었으나 삼국통일 후에는 점차 정치적 지위를 잃어 갔다.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은 성덕왕 때, 왕의 의지와는 달리 무열왕계 왕족들로부터 심한 견제와 따돌림을 받았고, 그러한 연유에서인지 혜공왕 때에는 김유신의 증손 김융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9세기 후반에는 김씨 칭성(稱姓)을 규제당하면서 신김씨(진경대사 金審希 등)를 칭하게 되었다. 결국 김해김씨(가야계 김씨)는 성덕왕 혜공왕 이후에는 쇠침하게 되었으며, 김유신의 후손들은 경주가 아닌 충청도 지역 등에도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갑족으로 뛰어난 인물 많아
김해김씨는 고려시대에 정승급 15명과 명신 공신 10여명, 장군 8명, 제학 11명 등 많은 문무명신을 배출하면서 위세를 떨쳐 삼한갑족의 하나로 명성을 드높였다.
조선시대에는 무오사화 등의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정승 1명이 배출 되는 등 인구수에 비해 부진하였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생원·진사 포함 1,300명 정도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명문거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무과 급제자 중에는 김구두쇠(金仇加金), 김글쇠(金文里金), 김끝남(金唜男), 김돌쇠(金石鐵), 김자근놈(金者斤老味, 이런 경우 큰아들은 대개 大老味(큰놈), 김허롱쇠(金許弄金), 김쇠(金金) 등 한글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병자호란 후 국방력강화 차원에서 수천 명씩 무과 급제자를 선발할 때 급제한 평민들이다. 안끝남(安唜男), 주얼동(朱於里同), 정끝동(鄭唜同), 옥글동(玉文里同)... 등도 같은 경우로 과거를 보기 위해 한글식 이름을 이두식 표현으로 한문식 이름을 만든 것이다.
김해김씨 인물들을 보면, 김유신은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나중에 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김홍도는 장승업, 안견과 함께 조선의 3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김만덕은 제주도 관기출신 상인이자 의녀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평생토록 헌신하였다.
김대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로, 선교활동 중 체포되어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김기창은 힘찬 붓질과 호방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며, 김활란은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을 지냈다. 한국 외환위기(IMF시대)를 극복하였으며,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였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이외에도 김해김씨에는 김종필 전 총리, 시인 김영랑(강진), 프로레슬링 선수 김일(보성), 시인이자 생명운동가 김지하(목포) 등 걸출한 인물이 많다.
 

영암인구의 13.4% 차지해
김해김씨는 중시조 김유신 이후 대소 148개 파로 나누어졌는데, 그중에서 김녕군파(=京派), 감무공파(=四君派), 판도판서공파(=三賢派), 문경공파 후손이 가장 많다.
‘사군파’라는 파명은 우리 영암출신의 학천군 김극조, 학성군 김완, 해성군 김여수, 학림군 김세기 등 4대에 걸쳐 봉군(封君)이 났기 때문에 붙여진 파명이며, 경파는 서울을 중심으로 거주하였고, 삼현파에는 4대에 걸쳐 3현인(김극일,김일손,김대유)이 났기에 붙여진 파명이다. 김해김씨는 2000년 조사에서 412만여 명으로 나타나 우리나라 인구의 9%를 차지했으며 김씨의 41.5%를 차지했다.
우리 영암의 김해김씨는 8,100명으로 영암인구의 13.4%, 영암 전체 김씨의 56.2%를 차지해 전국 평균보다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학산면, 서호면, 영암읍, 신북면 외 관내 여러 곳에 대소 김해김씨 집성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학산면,서호면 등에 많이 살고 있는 김해김씨 사군파의 입향조는 김완 장군의 증조인 김한성 선생으로 강진으로부터 이거하였으며, 영암읍 교동리(입향조: 김연)에는 도사공파가 많이 살고 있다. 도사공파의 시조인 농암 김연 선생은 고려말 충신인 이색 정몽주와 교류가 깊었다. 농암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1392년 벼슬을 버리고 서문밖 교동리에 입향하였으며, 그 후 서문 밖에 많은 후손들이 살게 되었다. 현재의 사당은 도로개설로 인해 경찰서 뒷편에 새로 지어졌다. 그외 영암 관내에는 부사공파 등 여러 분파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영암의 대표적 무신 가문
김해김씨 영암인물을 살펴보면, 김완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정유재란 때 남원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진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학성군에 봉해졌다. 뒤에 황해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김극조 선생은 무과에 급제하고 광양현감 등을 지냈으며 학천군에 추봉되었다. 김극희 선생도 무과에 급제하고 거제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한산도 전투에서 아들 선전관 김함과 선봉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올랐으며, 서호면 운호사에 주벽으로 배향되었고, 학산면 충효사에도 김극희·김함 부자를 향사하였다. 아들 김함도 원종공신이다. 김여수는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지내고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변방의 오랑캐를 잘 다스렸으며 군제를 잘 통솔하여 해성군에 봉해졌다.
김세기도 무과에 급제하고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학림군에 봉해졌다. 김우는 효심이 지극하였으며 무과에 급제하고 의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괄의 난 평정에 공헌하여 진무공신이 되었다. 김여준은 소현세자 등이 인질로 심양에 갈 때 같이 간 18장사 중의 한 명으로 월명비안(月明飛雁)의 시를 읊은 것으로 유명하다. 김응수는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에 이르렀으며, 금산 전투에서 조헌의 700의병과 함께 순국하였다. 김덕흡은 정유재란 때 전몽성과 같은 날 전사하였으며, 숙종 때 형조좌랑을 하사하였다.
19세에 서경택의 아내가 되었던 열녀 김씨도 김완 장군의 후손이다. 그외 무과 급제자로 부사 김세추, 현감 김세량, 김시중, 김안택, 김영식, 김치일, 김홍택, 그리고 생원·진사·문과에 급제한 김태정, 진사시에 합격한 김윤해, 김인철 및 참봉 김여옥 등 많은 영암 인물이 있다. 또 독립운동가 김상포, 시나위가락에 판소리가락을 도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가야금산조의 틀을 만든 김창조, 김창조 선생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전수받은 김병호, 김창조 선생의 손녀로 가야금산조의 명인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김죽파,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 민선군수 출신으로 김철호(사군파), 김일태(도사공파) 전현직 군수 등이 있다.   문태영 객원기자(네이버 명예지식인)

농암사 영암읍 남풍리에서 서남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도사공파의 시조인 농암 김연 선생의 사당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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