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성씨기행 <12> - 하동정씨편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의 정인지, 임진왜란의 영웅 정운 장군을 배출한 가문

화수정 - 영암읍 용흥리 새실마을에 있는 화수정(花樹亭)은 1910년 경에 건립되었으며, 강학(講學), 대동계, 마을이나 문중의 대소사 회의 장소이자 하동정씨 재각(齋閣)이다. 화수정 뒷 뜰에는 하동정씨 영암 입향조인 감찰공 정의숙의 제단이 마련돼 있다.
영암지역 65개 본관에 2500여명
정(鄭)씨의 본관은 문헌에 247개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2000년 조사에서는 136본관이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인구는 201만 명으로 전국민의 4.4%를 차지해 김·이·박·최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우리 영암지역의 정(鄭)씨는 65개 본관에 총 2천473명으로 영암인구의 4.1%를 차지했는데, 이는 전국 비율보다는 낮은 수치이다. 그중에서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조선씨족통보 등에 시조를 달리하는 6계통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3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계통의 시조 정도정(道正)은 신라말에 하동지방과 그 주변을 관장하는 호족의 장으로, 향병(鄕兵)을 단련하고 있다가 고려 건국에 참여하여 평장사를 지냈다. 시조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정석숭(碩崇)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둘째 계통의 시조 정응(膺)은 고려 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도첨의좌정승을 지냈으며 태자관의 첨사를 맡기도 하였다. 셋째 계통의 시조 정손위(遜位)는 고려 숙종 이후 5왕을 보필하며 벼슬을 하여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하동백에 봉해졌다.
하동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1명, 문형(대제학) 1명을 배출하였으며, 사마시 포함 과거 급제자 3백 수십 명을 배출하였다.(문과 63명, 무과 38명, 사마시 130명, 역과 43명, 의과 21명, 음양과 8명, 율과 9명). 하동정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초(招)와 정인지(麟趾)를 들 수 있다. 문경공 정초는 태종 5년(2/33위)과 태종 7년(7/10위) 두 번 문과에 급제하고 관찰사·공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천문학과 역법 등 자연과학에도 능통하였다. 세종 12년 최고의 농서(農書)인 “농사직설”을 편찬하였고, 정인지와 함께 역법을 개정하였다. 세종 13년 “회례문무악장”을 편찬하였고, 세종 15년 이천과 함께 혼천의를 만들었다.
문성공 정인지는 조선 전기 문신 겸 대표적인 유학자로 성삼문.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고, 안지(安止)·권제(權踶)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천문·역법·아악 등에 관한 책을 많이 편찬하였다. 세종·문종 대에는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고, 단종~성종 대에는 정치 안정에 기여하였다. 그는 태종 14년(1/33위)과 세종 9년(1/12위) 문과에 두 번 장원 급제하여, 조선시대에 문과에 두 번 장원 급제한 10명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맡았던 관직만도 30개가 넘으며, 세조 1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좌의정이 되고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하동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 1년 영의정부사(영의정)로 승진되고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예종 1년에는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성종 1년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이듬해 좌리공신 2등이 되었다.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증손녀가 덕흥대원군의 부인인 하동부대부인으로 선조의 생모이다.
하동정씨 근현대 인물로는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2001년 작고) 회장이 있다. 그는 1937년 9월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시작하여 현대그룹으로 성장시켰으며,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권의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방북하므로써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2차로 1998년 10월 27일에는 소 501마리를 가지고 방북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남북 민간교류의 획기적 사건인 ‘금강산관광’을 성사시켜 1998년 11월 18일 첫 출항하였다. 그는 국내외의 여러가지 상과 훈장을 받았으며,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1996) 등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에 회고록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991),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1998) 등이 있다.
새실마을 등에 집성촌 이뤄
하동정씨 분파는 분류하기에 따라 다르나, 정도정계는 크게 산원공파, 문성공파(보성 박실문중 등 여러 지파가 있다), 현감공파(부산,경남), 소윤공파(광주), 문헌공파(함양), 장령공파(광주,전남), 병사공파(광주), 경렬공파(광주,전남), 진사공파(부산,경남)가 있으며, 정응계 중에서 광주,전남에 많이 거주하는 파로는 추선문중(광주), 판관공파(고흥), 직장공파(순천·낙안), 유수공파(광주), 사직공파(보성), 생원공파(보성.광주)가 있다. 하동정씨 항렬자는 도정계, 도정계 문성공파, 손위계, 응계 모두 다르나 모두 5행상생법을 채택하고 있다.
하동정씨 인구는 2000년 조사에서 15만8천396명으로 나타나, 전국민의 0.34%, 전 정씨의 7.9%를 차지했으며, 전국 시도 중에서는 광주,전남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영암의 하동정씨는 1천125명으로 영암인구의 1.9%를 차지했는데, 이는 전국 평균의 6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그리고 전국 정씨의 7.9%인 하동정씨가 영암에서는 45.4%를 차지해, 우리 영암에 하동정씨가 특별히 많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동래정씨는 영암에 전국 평균의 4분의1 수준으로 특별히 적게 살고 있다. 하동정씨 세거지(집성촌)로 우리 영암에는 영암읍 용흥리(새실), 신북면 모산리, 금정면 용흥리 등이 있으며, 인근의 나주, 해남, 강진에도 많이 살고 있다.
임진왜란의 영웅 정운 장군
신북 모산리 모산사(茅山祠)에는 하동정씨 위인 세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모효재(慕孝齋) 정문손(文孫) 선생은 조선 전기 유학자로, 중종 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장령공파 파조 정희주(希周)의 증손이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명하다 실패하자 태학관 유생 10명과 함께 낙향하여 금강11인계를 조직하여 나주 왕곡면 송죽리에 금사정을 세우고 정치의 비정함을 한탄하며 후일을 기약한다. 재야에 있으면서도 지극히 효도하여 마을에서 모두 공경하였다는 사실이 ‘기묘명현록’에 기록되었으며, 나라에서 정려(旌門을 세워 표창)를 내리고 복호(復戶·부역이나 조세 면제)의 특혜를 주었다. 영암 금정면 쌍효리에는 모효마을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는데, 모효재 정문손 선생이 시묘한 곳으로 그의 호를 따서 ‘모효마을’이라 하였다.
하곡(霞谷) 정운룡(雲龍) 선생은 성리학자 기대승에게 수학하였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장성현감 이계(李契)의 초빙을 받아 선비들을 가르쳤고, 개천정사(介川精舍)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정여립과 친분이 있었으나 그의 사람됨을 꺼려하여 절교하고, 정여립과 가까웠던 이발과도 교분을 끊었다. 선조 22년 정여립이 반란을 꾀하다가 죽은 뒤, 그가 정여립에게 보낸 절교서 때문에 선조의 신임을 받고 왕자사부에 제수되고, 그 뒤 장원서장원·고창현감 등을 지냈다. 박순·고경명 등과 학문을 닦았고, 정철과 교유가 깊었다. 승지에 추증되었다.
충장공 정운(運)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선조 3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영암읍 용흥리의 진사 정삼광(三光, 장령공파 파조 정희주의 손자)의 증손이자 직장공 정윤(允)의 손자로 해남 옥천 건교촌(당시는 영암이었음)에서 태어났다. 거산도찰방·웅천(마산·창녕)현감·제주판관 등을 지냈는데 그의 강직하고 정의로운 성격 탓으로 상관들과의 알력으로 벼슬길이 순탄치 않다가 류성룡의 천거로 선조 24년 임진년 녹도만호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절도사 충무공 이순신의 측근으로서, 적병이 호남에 이르기 전에 먼저 나아가 칠 것을 주장하고 선봉장이 될 것을 자청하여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도대첩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며,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선조 37년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정조 20년에는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에 추증되었으며, 영암의 모산사, 해남의 충절사, 순천의 충무사, 고흥의 쌍충사, 부산의 충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특히 충무사는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8호로 충무공 이순신과 이순신이 죽을 때 이순신을 대신하여 독전했던 양 왜란 때의 명장 송희립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부산 다대동 몰운대에는 정조 22년에 세운 ‘충신정공운순의비(忠臣鄭運公殉義碑)’가 있으며, 부산시민의 날은 정운 장군이 전사한 부산포해전이 있던 날짜(1592년 음력 9월1일)를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5일이다. 또한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에서는 매년 여름 ‘정운 장군배 전국 카이트보딩 대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해군에서는 정운 장군의 충심을 기리고자 해군 209급 잠수함 6번함을 ‘정운함’이라 명명하였다.

하동정씨 영암지역 인물로는 학계에 정동규 전 동경대학교 교수, 정순석 이학박사, 정재표 전 구림초등학교 교장, 법조계에 정순복 전 광주지방법원 집행관, 정순일 변호사, 관계에 정길채 전 시종면장, 정남수 전 금정면장, 정순기 전 시종면장, 정찬윤 전 도포면장, 정찬희 영광세무서장, 화가 출신으로 정기봉, 정현숙, 정회남씨 등이 있다. 또 사업가로 영암경찰서 부지를 희사하고 영암중학교 전신인 농업실습학교 설립에 기여한 정남종 전 동양기업(주) 대표, 정기태 선진해운항공(주) 대표, 정찬우 현우무역(주) 대표, 그리고 정의채, 정중채 전 영암향교 전교 등이 있다.
    문태영 객원기자(네이버 명예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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