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성씨기행 <11> - 문화류씨편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류차달…사육신 류성원의 가문

신북면 모산리에 있는 영팔정은 고려말∼조선초 문신인 하정 유관(1346∼1433)이 주위 경치에 감탄하여 아들 맹문에게 시켜 조선 태종 6년(1406)에 지은 정자다. 처음에는 모산리의 ‘모’자와 호인 하정의 ‘정’자를 따서 ‘모정’이라고 불렀으나 훗날 율곡 이이·고경명·남이공·유상운 등이 주변경관을 팔영시(八詠詩)로 읊어서 ‘영팔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87년 전남기념물 제105호로 지정됐다.
수 많은 인물배출…7대 명벌
류(柳)씨는 문헌에 130여 본관이 전하나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는 총 60여 본관이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문화류씨 인구가 절반 정도를 차지하며, 예전에는 다른 본관들도 모두 문화류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보았으나, 근래에는 본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류씨와 차(車)씨가 같은 뿌리라는 말이 있으나, 최근 보학계와 사학계의 연구결과,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문화류씨 측의 주장이다. 문화류씨 시조 대승공 류차달(車達)은 유주(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의 호족 출신으로, 고려 건국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미를 보급하는 등의 큰 공을 세워 대승의 관직과 삼한공신의 훈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좌윤공 류효금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구월산을 지나다가 큰 범을 만나 그 입 속에 걸려있던 비녀를 빼내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범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산신령인데 무슨 물건이 목에 걸려 심히 괴롭던 중 공이 나를 구해 주었으니 그 음덕으로 공의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하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문간공 류공권, 문정공 류경, 정신공 류승, 장경곤 류돈 등 수대를 이은 증시(贈諡)가 있었으며, 특히 9세 류경은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왕정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일등공신에 봉해졌다. 그가 고향인 문화를 식읍으로 하사받는 등 선조들이 문화에 세거하였기에 문화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문화류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140여 명이 대과(문과)에 급제하였고 음사(蔭仕) 포함 실직 당상관이 90여 명, 시호(諡號) 22명, 상신(相臣) 9명, 호당(湖堂) 5명, 청백리 4명, 공신 11명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 결과 문화류씨는 상신,문형(대제학),왕비의 수를 근거로 한국족보문화연구원에서 선정한 우리나라 7대 명벌 가문으로 선정기도 했다. 문화류씨 인물을 살펴보면, 고려말 조선초의 인물 청렴재상 영의정 하정 류관, 사육신의 한 사람인 낭간 류성원, 을사사화 때의 강직 대신 송암 류관, 임진왜란 때 선무공신 문흥군 류사원, 실학의 원조 반계 류형원, 발해고(발해 역사책)의 저자 영재 류득공 등이 특히 드러나는 인물이며, 그 외에도 많은 인물이 있다.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한 유현(儒賢)과 충,의,효,열로 정려와 복호(부역,세금 면제 혜택)를 받은 사람이 80여 명에 이르고, 무과 및 소과에 급제한 인물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영팔정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뒤에 있는 '분비재'라는 건물이다. '분하더라도 흥분하여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분비재는 모산리에 예전부터 내려오는 마을의 강당이자 서당이다. 바로 앞에 있는 영팔정이 고고한 운치를 자랑하는 곳이라면 이 분비재는 학문을 닦는 곳이다. 하정공 7대손인 송계 류공신이 조선 인조 21년 1643년 건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 '영락보'
문화류씨 족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도 소규모의 필사된 계보는 귀족들 사이에 작성되고 있었으나, 족보다운 족보는 1423년(세종 5)에 간행된 문화류씨 '영락보'가 최초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로는 1562년 간행된 문화류씨 '가정보'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1476년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가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임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 15세기에 간행된 족보로는 남양홍씨(1454년), 전의이씨(1476년), 여흥 민씨(1478년), 창녕 성씨(1493년)족보 등이 있다. 그리고 문화류씨 대종회에서는 柳(류, 유)씨는 본관을 불문하고 한글은 '류', 영어는 'Ryu'씨로 표기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호적 인명(人名)란에 한문만 기재하여 문제가 없었으나, 1960년대 이후 한글사용 확대 및 두음법칙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柳, 李, 羅씨 등의 한글 표기에 혼란이 생겼다. 그 후 문화류씨 문중의 '류' 표기 결의, 정부의 호응, 행정부와 사법부의 '유' 표기 결정 등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행정소송 등 문화류씨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2007년 7월 대법원은 두음법칙에 상관없이 '류'씨로 표기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문화류씨 인구는 2000년 조사에서 284,083명으로 나타나 전국민의 0.6%, 전체 류씨의 47%를 차지했으며, 우리 영암지역의 문화류씨는 628명으로 영암 인구의 1%, 영암 총 류씨의 80%를 차지했다. 이처럼 영암에 문화류씨 비율이 유달리 높은 것은 신북 모산리 등 몇 군데의 문화류씨 집성촌이 있기 때문이기는 하나 아주 특이한 경우라 하겠다. 영암에는 류(柳)씨 25개 본관에 7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시도별로 문화류씨는 각 시도 인구 대비 충남, 충북, 대전, 경남에 많이 살고 있다. 문화류씨 분파는 시랑공파(11세, 溏), 문숙공파(14세, 思訥), 하정공파(13세, 寬) 등 시조의 11세 내지 14세 대에서 14大파로 나뉘며, 항렬자는 각 세마다 두 자씩인데 51세: 本ㅇ, 彬ㅇ, 52세: ㅇ然, ㅇ勳, 53세: 壽ㅇ, 垂, 54세: ㅇ鐸, 55세: 漢ㅇ, 澣ㅇ, 56세: ㅇ東, ㅇ秉, 57세: 寧ㅇ, 應ㅇ, 58세: ㅇ周, ㅇ堯, 59세: 鍊ㅇ, 銓ㅇ, 60세: ㅇ沂, ㅇ泰로 오행상생법을 따르고 있다.
문화류씨 집성촌으로 우리 영암에는 신북 모산리 이천리 월평리, 덕진 장등리, 금정 안노리 등이 있으며, 도내에는 여수 율촌면 가장리(하정공파), 담양 창평면 유곡리(지후사공파), 나주 봉황면 덕림리 동호리(좌상공파), 화순 동면 언도리(검한성공파), 곡성 신기리 대평리,해남,광주,무안,나주(충경공파)가 있다. 그외에 전북 김제 공덕면 황산리, 남원 수지면 초리, 경기 광명 가학동 공석골, 연천 백학면 노곡리, 충남 서산 부서면 동사리, 충북 제천 청풍면 황석리, 옥천 군북면 추소리, 충주 노은면 대덕리 안락리, 대구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 등 전국에 산재해 있다.
모산팔경을 노래한 편액도 보인다
모산리는 父子 정승 마을
모산리에 문화류씨가 살기 시작한 것은 전라도 관찰사와 우의정 등을 지낸 문간공 하정 류관(하정공파 파조)의 후손인 모간공 류용공 선생과 건원릉참봉 류용강 선생 종형제가 모산리에 정착하면서 부터이다. 류용공 선생은 광주목사인 아버지(希渚)의 임지에 따라와 거주하던 중, 모산리에 세거하던 하동정씨 가문의 여식과 결혼하여 모산리에 정착하였고, 영암군수를 지낸 영암공 류희정의 아들인 류용강 선생도 모산리에 정착하여 이들 종형제가 모산리에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모간공의 5대손 류철신이 여수 율촌면으로 이거하는 등 후손 중 일부는 여수, 정읍 등지로 이거하였다. 일찌기 하정공이 아들(孟聞)을 시켜 모산리에 영팔정을 지은 것을 보면 모산리에 대한 하정공의 사랑이 대단했던 것 같다. 모산 류씨들은 문화류씨 '하정공파 고양공(고양군수 柳順行, 모산리 입향조 종형제의 조부)종중'으로 불리며, 그 안에도 단계별로 여러 족중이 있다.
호남읍지(1897년)에 기록되어 있는 문화류씨 영암 인물로는 사교당(四矯堂) 류준(浚)선생이 있다. 류준 선생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39년(1606년) 생원시에 합격(51/100위)하여 상사(上舍)가 되고, 인조반정 후 금오랑(의금부도사)에 제수 되었다. 이괄의 난 때에는 인조를 호가(扈駕.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뒤따르던 일)한 공으로 상의원 판관에 제배(除拜, 제수)되었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하였다. 관직을 그만둔 후에는 모산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았으며, 감찰, 판관에 제수되었을 때에는 조상의 제사를 제대로 받들 수 없다고 하며 감사의 인사만 하고 돌아와 무덤 옆에 집을 짓고 7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사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부인은 태종의 7대손 부원군 이경록의 딸이며, 영암 청풍원에 합장했다. 자녀는 4남을 두었는데 현감 류성오, 전력부위 류신오, 생원 류창오, 진사 류형오이다. 그 외에 호남읍지상의 영암 인물로는, 효종 1년 생원시(27/100위)와 진사시(98/100위)에 (67/100위)한 류종신, 숙종 4년 생원시에 합격(68/100위)한 류영한, 진사 류상재,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경력, 동지를 역임한 류상로 선생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모산리 문화류씨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다. 좌랑을 지냈으며 증 찬성인 류속, 모산리 영팔정을 중건하였으며 영의정을 지낸 류상운, 대사간을 역임한 류상재, 문과에 두 번 급제했으며 좌의정을 지낸 류봉휘, 교리를 지낸 류봉서, 부윤을 지낸 류필원, 찰방을 지낸 류상진 등 많은 인물이 있다. 선대에 한양에 살았고, 한양에 가서 벼슬을 하며 거주한 경우가 많아, 한양이나 경기도 등 타지에서 태어나거나 서울, 경기 지역에 묘가 있는 경우도 많다.
정계 등 각계에서 많은 활동
문화류씨 영암 지역 현대인물로는 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류인곤, 11대 국회의원 류재희, 13~14대 국회의원과 조폐공사 사장을 지낸 류인학씨가 있다. 학계에서는 류명렬 전 광주교육대학 교수, 류승남 전 국민대 교수, 류왕렬 전 목포대 교수, 류재민 현 동강대학 총장, 류호평 전 광주대 교수 등이 있다. 관계출신으로는 류수택 전 광주시 행정부시장, 류근섭 전 광주지방법원 사무국장, 류철 전 경제기획원 부이사관, 류동렬, 류봉기, 류웅, 류인구, 류형렬 전 신북면장 등 많은 인사들이 있다.
군인과 경찰직으로는 류부열, 류재기씨가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고, 류영선 육군 대령, 류종렬 전 무안경찰서장, 그리고 의료계에서는 류근상 전 중앙성심병원장, 류선열 전 전남대학교 치과대학장, 류완열 일본 품천안과의원 원장, 류재업 서울 유성의원 원장이 있다.
또한 전국체육대회에서 승마선수로 명성을 떨치고, 88올림픽 준비차 미국 출장중 KAL기 폭파사건으로 순직한 류춘택 대한승마협회 전무이사, 류호경 오만왕국 태권도 대표팀 코치가 예체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경제계에서는 류건 전 교보생명, 교보문고 사장, 류경렬 제일건설 회장, 류종 전 대한석탄공사 부사장 등이 있다. 그 외 류선주 전 한일은행 지점장, 류재건 전 유도회 영암군지부 회장 등이 영암출신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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