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 선거 민국당 중진 줄줄이 낙선
전남지역 17명 대거 당선 불구 낭산 패배
지역구 등한시·좌익세력 악선전 등 영향


이승만 대통령 영접

▲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된 낭산은 2년뒤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사진은 낭산의 선거유세 장면.
낭산은 야당이었지만 이승만 박사가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여건을 조성하여 도와 주려했고, 또 건국초기에는 행정부의 권한이 약한 것이 오히려 폐해가 많을 것이라 여겨 개헌에 반대했다. 그때 김성수는 낭산에게 반대하더라도 성명서 발표만은 하지 말라고 수차 간청하였다.

3월14일 헌법개정안이 부결된 후 민주국민당 당원들은 위로하기 위하여 서울 충무로에 있는 청향원에서 위로연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서상일이 당원들을 격려해주었다. 낭산이 그 자리에서 헌법개정에 반대하여 술먹기가 어색하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오히려 낭산에게 술을 권하며 위로하였다.

제헌국회의 기한은 2년이기 때문에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민주국민당의 헌법개정 문제 때문에 크게 격노하여 전국 각처로 유세를 다니면서 ¨민주국민당이나 공산당이나 마찬가지니 민주국민당원에게는 절대로 투표해주지 말라.¨고 극언하였다. 마침내 5월 26일 이승만 박사가 전라남도 광주에 오게 되었다. 낭산은 하루만큼은 전라남도 영암에서 선거운동을 않기로 작정하고 광주에 가서 이승만 대통령을 영접하였다. 그런데 그때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인 신성모가 함께 와 있었다.

공무원의 부당한 간섭
낭산이 독일유학을 마치고 영국에 있을 때 조그만 배의 선장이던 신성모를 만나 그 때부터 알고 지내는 처지였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 민국당원이던 내무장관 김효석을 파면하고 백성욱을 내무장관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목적은 민국당원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자는 데 있었다. 신성모는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낭산이 선거운동을 하러 지방으로 내려갈 때에 그의 선거구에 꼭 한 번 내려오겠다고 약속했었다.

선거가 중반전에 들어가자 낭산의 선거구인 영암군의 경찰서장도 경질되어 선거 간섭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약속한 바도 있었기 때문에 낭산은 신성모에게 전보를 쳐서 선거구인 영암으로 한번 와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전보에 대한 반응이 없던 신성모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광주에 왔기에 낭산은 신성모에게 ¨선거 때 도와준다더니 어찌 됐소? 경찰의 간섭이 극심합니다.¨라고 말했다. 신성모는 ¨직접 얘기하시오.¨하였다. 낭산은 ¨누구한테 직접 하라는 말이오?¨하였더니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말하라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광주 서중학교에서 연설하게 되었다. 이대통령 내외분과 낭산과 신성모가 단상에 앉게 되고 도지사, 경찰국장 등은 뒤에 서게 되었다. 그때 이대통령은 고개를 돌려 ¨낭산! 어때?¨라고 말하였다. 낭산은 ¨선생님을 국회 내외서 도와드렸는데 경찰이 선거방해를 해서 못하겠습니다. 선생님이 못하게 하시면 국회에 안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크게 대답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지방에 돌아다니는 것은 공무원이 부당한 간섭을 할까 하여 다니는 것인데, 다른 곳은 괜찮은 모양인데 여기서는 부당한 일을 한다는 것이니, 한층 주의하기 바란다.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앞에는 각 군의 경찰서장이 정열해 있고 뒤에는 지사와 경찰국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대통령이 광주에 와서 말한 사람은 낭산 한 명뿐이므로 낭산이 그 말을 한 것이라고 알아차렸다.

낙선의 아픔
그리하여 전라남도에서는 선거 분위기가 매우 완화되어 민국당원 및 민국당 계열이 전라남도에서 17명이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낭산과 조병옥, 서상일 등 민국당 중진들은 낙선되었다.

낭산이 낙선된 데에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가 거론되었다. 첫째, 낭산이 야당인 민국당의 거물급 인사여서 경찰과 공무원이 극심한 선거간섭을 하였으며 둘째, 지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무투표 당선된 까닭에 선거를 너무 쉽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낭산은 2년 전에 당선된 이래 영암지역에 단 한번도 내려간 일이 없었다. 선거에 대해 너무 등한시한 것이었다. 셋째, 좌익계열 세력의 악선전 영향도 컸다. 정부가 수립되던 그해 10월, 여수, 순천 쪽의 백운산 등을 넘어 월출산에도 많이 잠복해 있었는데, 경찰이 출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

본래 영암지방에는 좌익계열들이 많아 좌익분자들이나 정적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죽은 것은 전라남도 영암출신 국회의원 낭산이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낭산이 서울에서 방공을 외쳐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반공적 이론이었을 뿐 공산주의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익세력은 이를 낭산을 비판하는 구실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낭산은 1950년 5월 30일 시행된 5·30 선거에서 낙선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낭산은 곧장 신성모를 만났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내무장관 백성욱에 대해 좋지 않은 기색을 보이고 낭산이 내무장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다. 낭산은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성모는 낭산이 내무장관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낭산을 좋아하고 중책을 맡게 되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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