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 참상을 불러왔는가?

천재지변인 자연재해도 알고 보면 그 재해가 발생하게 된 원인이 있는 것 같이, 인간에 의하여 발생한 모든 사건에는 그 사건이 발발하게 된 이유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영암에서 발생한 6.25 대 참상도 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규명하고 접근하기에는 쉬운 일은 아니나 다음과 같은 주된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무모한 작전명령과 이에 임했던 군경책임자 및 좌익 활동 분자들의 광적인 인간성과 패륜적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기술하였던 사례에서와 같이 군서면 구림 학살사건과 금정면 차네동 학살사건 및 덕진면 장선리 집단학살사건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구림학살사건은 영암경찰이 구림사람들 중에서 좌익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처리한다는 명분으로 구림마을에 진입하였으나 좌익 활동 관련자는 이미 피신, 일반주민들을 감정적이고 계획적으로 2차에 걸쳐 주민 90명을 집단학살한 경우이다.

 

또 금정면 연보리 차네동 집단학살사건이다.

목포 해병대 (대대장 박종옥)와 목포 유달부대가 빨치산 토벌을 위해 차네동으로 진격하던 중 마을 어귀에 매복하고 있던 빨치산의 기습을 받아 3명의 전사자가 발생, 이에 격분한 군경토벌대가 주민 170여 명을 집단학살한 경우이다.

여기에서 목포해병대 대대장이었던 박종록과 목포형무소 집단탈옥과 관련된 정관호의 기록을 살펴보고자한다. 1949년 9월 14일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은 당국의 가혹한 처우에 반기를 들고 재소자 전원이 탈옥에 가담했는데 그들 가운데서 353명이 도로 잡혔다.

군경들은 이들을 트럭에 싣고 목포시내 가가호호를 돌면서 “인육배급”을 한답시고, 문간에서 1명씩 살해해서 마당에 팽개쳤다. 물론 희생자들은 다 좌익수였고, 그들을 지지하거나 숨겨준 시민들에 대한 앙갚음으로 이 끔직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제갈독수와 더불어 좌익 탄압의 선봉장이었던 박종록 등이 고의로 꾸민 것이라는 증언이 있다. 즉 하수인들로 하여금 죄수를 가장해서 감옥에 들어가서 거사하게끔 선동함으로써 빚어졌다는 것이다.(정관호의 전남유격투쟁사, 217)

 

또 한 사례는, 지방 좌익들에 의해서 1950년 10월 6일 밤에 자행된 덕진면 장선리 집단학살사건이다. 이 마을 피살자 중에는 다섯 살 미만의 어린애가 3명이나 포함되어있고, 전 덕진면장의 모친은 좌익들이 내려친 도끼에 이마를 맞아 피살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23명이 집단으로 살해된 것으로 파악된다.

필자가 입수한 피살자 명부와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이 마을 주민의 증언을 종합하여 보면 덕진면 장선리 집단학살을 포함, 앞에서 예시한 사례의 집단학살은 지휘책임 관련자들의 함몰된 인간성과 패륜성이 광란적 행태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영암은 금정면 국사봉이 있고, 장흥유치 등 군사적 요충지와 바로 접해있다.

국사봉을 중심으로 한 장흥 유치일대는 산악이 높고 깊으면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군사적요충지다. 그래서 6.25전쟁이전에는 전남도당 본부가 있었고, 6.25전쟁 때는 유격대 전남 제 3지구인 유치유격대사령부가 설치되었다. 구한말에는 호남의병활동의 주 거점이었다.

국사봉은 지리적으로 나주 화순 장흥 강진 영암 등과 연결이 용이하고 지리산과도 연결이 용이하다. 그래서 6.25전쟁 발발 이전에도 구빨찌들이 입산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9.28이후에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과 지방좌익세력들이 국사봉 등 유치산악지대로 입산하여 인근 주민들을 상대로 보급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이에 응하면 좌익으로 몰려서 군경에 의하여 학살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빨치산들에 의하여 학살되는 등 보복살해의 악순환이 진행되어 많은 피살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10개 군을 관할하던 유치 유격대 총사령관이 영암사람 황점택으로 그의 입장에서는 영암만큼은 결사항전의 심정으로 유격전을 벌이면서 영암에 많은 피살자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는, 농업경영구조의 취약성과 경도(傾倒)된 사상(思想)의 유습(遺習)을 생각해볼 수 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지주와 소작인에 의한 농업경영사회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문제점은 일제가 시작되면서 극치에 달하였다. 영암에서는 특히 그러하였다.

 

일제하인 1928년 현재 영암의 인구는 7만 7천여 명으로 이중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7만1천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농민구성에서 영암에서의 소작농의 비율은 전남에서의 평균보다 훨씬 높은 90%이상을 차지하고, 지주와 자작농의 비율은 10%이내였다.

영암에서의 지주들은 영암사람들은 몇 사람 안 되고 일본인이 절대적이고, 강진 나주 목포 등 외지인 들이 영암에 농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암에서는 전남 다른 지역에서 보다 소작료 율이 높고, 소작권이 자주 이동되었다. 이로서 영암사람 대부분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불안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러시아의 볼세비키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이러한 사조가 영암에까지 유입, 청년단체 등에 의한 소작인회 머슴회가 조직되는 등 영암인의 의식이 성장하였고, 사회주의 단체도 조직되었다. 이는 지주와 소작인의 대립과 갈등, 소작인들의 생존투쟁이 일본인 지주들과의 투쟁, 농민항쟁이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1932년에 나타난 영보정 사건이요 일명 형제봉사건으로, 영암사람들 중에는 사회주의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의식이 군민들에게 내재된 상태에서 해방이 되었고, 정국(政局)이 혼돈과 어수선한 상황에서 좌파였던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원회가 일시적으로 치안을 맡으면서 영암에서도 좌익 활동이 활발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좌익 활동이 불법화되었고, 1948년 정부수립이 되면서 농지개혁을 단행했으나 영암에 오래도록 내려오던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과 대립관념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서 영암군민들의 의식은 혼돈과 불안이 가속화되면서 좌우익으로 갈리고, 흑백대립의 극한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북한의 김일성정권의 지령과 남한정부의 지시에 의한 집단학살이 영암에서도 대 참상의 주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용서하고 화해할 때다

빨치산추모제가 열렸다.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2003년 4월 5일 12시에 백운산 자락인 한재(해발852.6m)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빨치산 생존자와 이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 등 1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앞서 숨져간 빨치산들의 추모제가 열렸다. 그동안 숨죽여왔던 이들은 광주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마산에서 모여 들었다. 냉전논리에서 시달리던 20세기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한국근현대사연구 2003년 가을 호, 제23집, 154쪽)

 

그런가 하면 빨치산의 활동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어 국내 대형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저자 정관호의 전남유격투쟁사 대표적 사례다. 놀라운 것은 그 자신을 포함한 전라남도 빨치산의 활동을 어떻게 광범하고 자세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였는지 의아하다.

 

더 더욱 놀라운 것은 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이 국회의석수에서 제3당이 되었고, 이들 중 여러 명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할 정도로 “종북주의자”의 언행을 여과 없이 토해도 국회의원 자리를 박탈당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옛말일 정도로 근래에는 변화가 심하다. 이 땅에 6.25전쟁이 일어 난지 60여 년이 지났다. 그간 세계도 많이 변했고, 우리나라도 많이 변했다. 공산주의는 지상낙원이라고 했던 소련은 공산주의 스스로의 한계에 봉착, 고르바초프에 의하여 종막을 고함으로서 공산주의는 전세기의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그러나 맑스의 기본사상은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추구하고자 하는 평등사상은 자본주의가 수정자본주의로 그 궤도를 수정하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극단적 보수와 극단적 진보의 이념논쟁은 그 빛을 바랬다.

이는 우리 영암에 던지는 메시지다. 이처럼 세계도 변하고 우리나라도 변했다. 영암의 6.25 대 참상, 진상은 규명하되 용서하고 화해 할 때다. 불로서 불을 끌 수 없고, 물로서 물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암사람들이 바라는 영암

영암사람들은 예로부터 살기가 좋아 순박하고 정이 많다. 그래서 문화의 꽃을 피워온 후예들이다.

6.25는 한반도의 오랜 역사에서 한때의 동족상잔이요, 영암사람들에게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대 참상이었다.

 

고대로부터 성군의 제일덕목은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있었다. 산이 좋아 물이 좋으면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태평가를 부르면서 학문에 힘쓰고, 예술에 힘쓰게 된다.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가 이를 입증하고, 영암이 그렇다. 영암은 월출산과 국사봉에서 발원하는 물이 영산강과 탐진강, 덕진강을 이루면서, 나주평야와 강진들을 일구고, 영암에는 몽해 들과 시종 옥야리 들, 군서 들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영암에는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조상대대로 영암을 지키며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다. 선사시대 움막집과 고인돌이 이를 입증하고 있고, 마한시대부터 조성된 군서구림, 시종의 마한문화권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영암사람들은 두레정신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혜가 넘치는 사람들이다.

영암사람들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살아왔다. 마을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을사람 모두가 함께 그 일에 참여하여 풀어나갔다. 상을 대비해서 상보계가 있고 상이나면 그 상을 함께 치루며, 아들 딸 결혼할 때 대비해서 ‘찰밥 한 시루 계’도 있다. 그런가하면, 햅쌀을 첫 수확했을 때도, 제삿날에도 마을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두레정신에 의한 상부상조와 인정이 넘치는 공동체였다.

 

여기에 무슨 사상이, 무슨 이념이, 무슨 좌익과 우익이 필요하겠는가?

 

그렇다. 영암사람들이 바라는 영암은 이처럼 인정이 넘치는 고장이요, 활기가 넘치는 고장으로, 출향한 사람들이 돌아오는 고향이길 바란다. 그리하여 마을 골목길에는 개구쟁이 들이 왁자지껄하고, 밤늦도록 자식들의 글 읽는 낭낭한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젊은 아낙네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영암으로 되 살아 나길 바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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