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는 시조가 다른 4계통이 있다.

전주최씨는 시조가 다른 4계통(4門派)이 있다. 문열공(文烈公)계는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하는데, 그는 고려 정종 때 벼슬에 나가고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숙종 때 병부상서겸 신호위상장군을 역임하였고, 완산부(全州)개국백에 봉해졌다. 사도공(司徒公)계는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데 그는 최치원의 지손(支孫)쪽이다. 그는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명종 때 소주주부에 이르렀다. 1172년(명종 2) 금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고려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경위를 조사할 때 접반사로 나가 일을 원만히 해결하여 명종의 신임을 받았고, 이듬해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북로도지휘사가 되어 토벌군을 지휘하다가 살해되었고 완산군으로 추봉되었다. 문성공(文成公)계는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후에 완산군으로 봉해진 최아(崔阿)를 시조로 한다. 그는 최순작의 7세손이다. 문충공(文忠公)계는 삼중대광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하고 완산부원군에 봉해진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한다. 그는 동주 최씨 시조 최준옹의 후손이다. (문열공계,사도공계,문성공계는 당나라 청하에서 왔고, 문충공계는 경상도 상산(尙山)에서 왔다고도 한다.)

 

최명길의 손자 석정은 영의정을 8번이나 역임

전주최씨 인물로는, 고려 말기 절신(節臣)으로 두문동 72현에 들어 있는 양(瀁. 문충공계)이 있고, 좌참찬 부(府)가 있다. 조선시대 때에는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을 배출하였는데, 사도공계 한성부판사 유경(有慶)의 후손 중에 인물이 많았다. 인조반정 공신 명길(鳴吉)은 여러 판서직을 거쳐 3정승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석정(錫鼎)은 명길의 손자로 우의정,좌의정,홍문관대제학을 역임하고 국조보감 속편과 여지승람증보 편찬을 지도하였다. 소론의 영수로서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도 8번(혹은 6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명길의 다른 손자 석항(錫恒)은 문과 급제 후 예문관검열 등을 역임한 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몸집이 작고 차림새도 늘 초라했으나 사리판단이 정확하여 관찰사 중 제1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 후 여러 판서직,좌참찬 등을 지낸 후 우의정에 올랐고, 실록청총재관으로 숙종실록 편찬을 주재하였으며 경종 때 좌의정이 되었는데 재직 중에 사망하였다. 철견(鐵堅)은 문과에 장원급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한 뒤, 임진왜란 때 전라도 도사로서 전주를 방어했으며, 그 후에도 도승지,황해도관찰사,호조참의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 밖에 태종 때의 예문관 직제학 덕지(德之),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크게 활약한 기필(琦弼)·균(均)·경행(敬行) 등이 있다. 그리고 전주최씨는 조선시대 때 문과급제자 109명 등 생원,진사시 포함 500여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영보는 문성공계 중랑장공파 후손들

전주최씨 집성촌으로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방교리와 산청리,화성군 정남면,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면 신후리,익산군 삼기면,왕궁면과 남원,김제,부안,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 일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구일리와 조촌리,진천군 진천읍,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수청리,서천군 마서면 봉남리,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대암동 등이 있다.

분파를 살펴보면, 문열공계는 예의판서공파, 판윤공파, 양도공파, 지평공파 등 6개 파로 나뉘고, 문성공계는 크게 안렴사공파, 대호군공파, 판서공파, 중랑장공파로 나뉜다. 문충공계는 군수공파, 현령공파, 절도사공파등 8개 파로 나뉘고, 사도공파는 완성군파, 판서공파, 총랑공파로 나뉜다. 우리 영암 영보지역의 전주최씨는 문성공계 중랑장공파(龍鳳, 연촌 최덕지의 증조) 후손들이며, 중랑공파는 다시 연촌공파, 소윤공파(得之, 연촌의 형), 송애공파(匡之, 득지 위의 형) 등으로 나누어 진다.

전북 전주에는 은행나무가 많은데 그중 풍남동 은행나무는 연촌(최덕지)이 심었다 하여 아주 유명하다. 연촌이 죽은 후, 과거를 보러가는 사람들이 은행나무 앞에서 최덕지 학문을 숭상하고 급제를 기원하는 묵념을 올리기도 하고, 정월 초하루에는 후학들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또 인품이 뛰어나고 오복을 두루 갖춘 인물로 알려진 연촌을 존경하는 여인네들이 그 은행나무에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정월 초하루 남정네들이 제사를 지내고 나면 여인네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아들을 점지해 달라며 눈물로 빌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정월 초하루 깊은 밤에 간혹 부인네들이 묵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연촌은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후 추천으로 사관이 되었고 감찰 등 삼사의 청요직을 거쳐 김제군수,남원부사 등으로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 영보촌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던 중 문종이 즉위하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이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성삼문은 5언절구, 이개는 7언절구, 하위지도 7언절구 시부를, 류성원은 사(詞)를 지어 그를 칭송하였다. 72세로 죽으니 생년은 1384년(우왕 10)이요, 몰년은 1455년(세조 1)이며,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 영암읍 교동리. 지금의 녹동서원)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리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 남원의 주암서원 등에도 제향되었다.



유현(儒賢)과 문과 급제자 등 문관 많아

그외 호남읍지상 영암 인물로, 충신 부문의 최개(漑, 소윤공파)는 임진왜란 때 병사 최경회의 격문에 따라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어 전사하였다. 유현(儒賢) 부문은 4명으로 연촌 말고도 3명이 있다. 산당 최충성(忠成)은 연촌의 손자이자 헌훤당 김굉필에게서 수업하였으니 남추강의 사우록에 나타난다. 녹동서원에 배향되고 문집이 있다. 동원 최정(珽)은 연촌의 7세손으로 1605년(선조38) 생원(10/100),진사(57/100)에 합격하였고 참봉에 이르렀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시,주(詩,酒)로 자위하며 지냈다. 초당 최선석(宣錫)은 정(珽)의 후손으로 성품이 순수하고 효심과 우의가 돈독하였다. 류준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전에 통달하였으나 과거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전심으로 학문을 연마하기 위함이었으며 시와 의례로 만족하니 한 시기의 사표가 되었다.

최탁(琢)은 1606년 생원에 합격(77/100)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벼슬을 포기, 유생들과 함께 이이첨의 간사함을 논척한 뒤 10여년간 두문불출하였다. 그 후 1629년 문과에 급제(12/25)하여 정랑,좌랑 등 중앙의 여러 관직과 영광현감 등 지방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최태두(泰斗)의 부는 최상요(尙堯), 조부는 최천록(天祿), 증조부는 최응용(應龍)으로, 1723년 문과에 급제(35/35)하였고 통덕랑,전적 등을 지냈다.

음직 부문으로, 연촌의 형인 소윤공 최득지는 15세에 성균관생원에 합격하였고 1413년(태종 13) 조정에서 경서에 밝고 바른 행동으로 천거되어 내외직에 두루 제수되어 한성소윤에 이르렀다. 사후에 사헌부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전주최씨 영암지역 현대 인물로는 학계에 최간열, 최규창, 최영, 최운열, 최원열, 최한수, 최흥열, 법조계에 최권열, 최득열, 최형모, 관계에 최건열, 최공열, 최규배, 최규학, 최규환, 최병효, 최영, 최영훈, 최종열, 최평열, 최필열, 군출신으로 최귀조, 최규대, 최영호, 의료계에 최웅, 최인식, 최인호, 언론계에 최봉열, 최병우, 최정, 최경천, 경제계에 최동열, 최윤호, 최준호, 금융계에 최기술, 종교계에 최건차, 그 외 최건일, 최광호, 최규용, 최규상, 최병환, 최희동씨 등 각계에 인물들이 많다./문태영 객원기자(네이버 명예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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